소설가 윤대녕씨(48)의 소설집 《대설주의보》(문학동네)는 눈코 뜰 새 없이 짓누르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이며 옴짝달싹할 틈도 없는 일상은 '뜨거운 모래밭에 앉아 누군가 금바늘을 들고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격'(<도비도에서 생긴 일> 중)이다. 하지만 언젠가 순식간에 환해지는 때가 찾아오는 삶은 아름답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에서 인간은 '저 들판의 비석 없는 무덤' 같은 처지로 묘사된다. 소설 속 '나'에게 수모의 절정은 첫사랑 은주가 자신을 버리고 삼촌의 아내가 돼 버린 일이다. 배신한 첫사랑이 깊은 상흔만 남겼다고 여겼지만 은주가 다시 나타난 순간,더 이상 원망도 증오도 남아있지 않다.

삼촌과 자신의 첫사랑인 여자에게 '나'는 묻는다. "아니,삼촌이 우리를 사랑했던 걸까요?" 그러자 숙모,은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하게 웃는다. 그렇게 해묵은 원망이 사그라지고 추억은 원래 가치를 찾는다.

<보리>는 해마다 청명 때 '오랜 옛날 발목을 다친 학이 논에 날아와 몸을 회복하고 다시 소나무 숲으로 날아갔다는 데서 유래한 유서 깊은 온천'에서 짧게 밀회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다. '가끔이라도 매달려 울 수 있는 태산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수경은 엄연히 가정이 있는 그에게 은밀한 만남을 제안한다.

몇 년 후 유방암 진단을 받은 수경은 참담한 심정으로 온천에서 남자를 기다린다.

'굴뚝에 갇힌 새처럼 결국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몸부림치는 꼴'을 오랫동안 겪어오면서도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설 속 학처럼 나름의 제의를 거쳐 마음을 추스르고 작별을 통보하는 수경에게 그제서야 남자가 매달리고 집착한다.

오랜 사랑이 추해지는 순간,오히려 수경은 차갑게 식은 남자의 등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내 어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라고 애타게 속삭인다.

수록작 7편 중 표제작 <대설주의보>가 백미다. 1년 가까이 '강물처럼 따뜻하고 고요하게' 관계를 이어나가던 연인들은 어이없는 농간과 오해로 파경을 맞는다.

그럼에도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로 지내오던 이들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다.

더이상 대설주의보가 내린 악천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소라면 차로 20분 거리를 한 시간 가까이 걸려,심지어 중간에 내려 정강이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며 6.3㎞를 걸어간 남자 앞에 어둠을 뚫고 느릿느릿 옛사랑이 빛이 되어 나타난다.

그저그런 일상에 파묻혀 있던 사랑이 다시 떨쳐 일어나는 순간,작가의 덤덤한 문장은 상처에 앉은 흉한 딱지를 조금씩 밀쳐내는 뽀얀 새살처럼 돋아난다.

'그것이 전조등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차가 다가올 때까지 윤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잔뜩 뒤집어쓴 알브이 차량이 체인을 쩔렁대며 그의 앞에 다가와 커다란 짐승처럼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젊은 스님이 타고 있었다. 이어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해란이 차에서 내렸다. '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