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마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더니 때마침 외환위기가 터졌다. 석사 시절(한양대 섬유공학과) SCI(과학논문인용색인)급 저널에 그가 쓴 논문이 세 편이나 실릴 정도로 '짱짱한' 실력을 갖췄지만 기업들은 외면했다. "지방대 학부(영남대 섬유공학과) 출신이라 차별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급 70만원짜리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인턴 연구원을 거쳐 벤처기업에 입사했지만 사장은 톡톡 튀는 그를 싫어했다. 다시 실업자 신세.

오갈 데가 없어진 그는 2002년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자본금 5000만원짜리 1인 회사 '제닉'을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이 전공했던 고분자 기술을 응용해 '수용성 하이드로겔 마스크 팩'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태평양과 LG생활건강에 납품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잡상인 취급하는 경비실에 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루에도 열 곳씩 찾아다녔던 피부과 병원에선 언제나 "바쁘니까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일명 '하유미 팩'으로 대박을 터뜨린 제닉 유현오 대표(40 · 사진)의 2002년 모습은 이랬다. 하지만 실패한 사업가가 어엿한 중소기업 사장으로 변신하는 데는 7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해 매출은 350억원.2008년(137억원)에 비해 무려 254%나 성장했다. 올해 목표는 작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650억원. 이미 1,2월에만 매출 105억원을 달성했다. 화장품 업계가 대표적인 '레드 오션' 산업임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률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난 18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만난 유 대표는 '차별화된 품질'과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유 대표는 "하유미 팩은 부직포를 이용한 기존 '시트 마스크'와 달리 고체와 액체의 중간인 겔 형태로 만든 덕분에 수분을 비롯한 각종 화장품 성분이 흘러내리거나 증발하지 않고 피부에 그대로 스며든다"며 "전 세계에 특허를 출원한 만큼 당분간 유사한 제품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 제품은 '신기술인정서'(2004년 과학기술부)와 '세계일류상품'(2005년 산업자원부)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기술력과 마케팅은 별개의 문제였다. 제닉에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에,그럴듯한 공장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유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화장품 선진국에선 제닉이나 태평양이나 똑같이 '메이드 인 코리아'로 취급받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중소기업청의 도움으로 만난 미국인 영업사원과 함께 샘플을 들고 미국 전역을 누빈 끝에 2004년 초 미국의 대형 할인점인 월그린과 타겟 등에 납품하게 됐다.

제품이 미국시장에 깔리기 시작하자 기대하지 않았던 호재도 이어졌다. 그렇게 무시하던 국내 대형 화장품업체들이 앞다퉈 "우리 제품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것.미국시장을 조사하면서 접한 신개념 마스크 팩이 제닉에서 제조된 사실을 알고 먼저 파트너십을 제안해 온 것이었다. 2005년부터는 자체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최은경 아나운서와 배우 하유미를 잇따라 모델로 기용,홈쇼핑을 통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유미 팩은 지난해 현대홈쇼핑의 화장품 부문 매출 1위에 올랐다.

유 대표의 다음 목표는 해외 시장이다. 2007년 현지 납품업체의 부도로 인해 철수한 미국시장에 다음 달 재진출하는 동시에 일본시장에도 뛰어들 계획이다. 미국의 경우 대형 할인점인 코스트코 매장에 제닉의 자체 브랜드인 '스킨 사이언스'로 판매된다. 국산 화장품이 코스트코에서 판매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에선 다음 달부터 현지 최대 홈쇼핑업체인 QVC에 관련 제품이 방송된다.

유 대표는 "오는 6월 공장 증설작업이 끝나면 생산량이 40%가량 늘어난다"며 "앞으로 제약업체와 손잡고 피부에 잘 흡수되는 파스 등 패치형 약품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헌/김영우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