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훈 중기전문기자 '현장 속으로'] "국내 근로자에 임금 훨씬 더 주더라도 핵심기술 代 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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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인터뷰 - 이희영 한국열처리 회장
국내에는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14개국에서 들어온 약 45만명(조선족 포함)의 외국인 근로자가 6만여개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도금 열처리 주물 단조 등 기반기술 업체들은 이들을 더욱 필요로 한다. 작업 환경이 더 열악하기 때문이다.
이희영 한국열처리 회장은 "열처리의 국내 저변이 튼튼해야 한다"며 사비를 털어 열처리공학회를 만들었고,열처리조합을 출범시켜 10년 이상 이사장을 맡았다. 영어와 일본어로 돼 있는 용어를 한국말로 바꾸기 위해 '열처리 용어집'을 펴내기도 했다. 뚝심이 돋보이는 기업인이다. 한때 외국인 도입에 앞장섰던 이 회장이 왜 외국인을 내보냈고,내국인만으로 어떻게 공장을 돌리고 있는지 알아봤다. 인터뷰는 완주공장에서 진행했다.
▼한국열처리도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왜 외국인을 내보냈나요.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외국 인력 도입을 앞장서 추진했지요. 10여년간 외국인을 고용해 보니 일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들이 과연 한국에서 대를 이어가며 열처리 기술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순차적으로 내보냈죠."
▼내국인들이 오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의 형편상 월급을 다른 회사보다 파격적으로 많이 줄 수도 없습니다. 물론 외국인보다는 30%가량 더 줍니다만(한국열처리의 초임 연봉은 전문대 졸업자의 경우 2200만원,대졸자는 2500만원 안팎이다).그 대신 인간적으로 대해주려고 마음 먹었지요. 직원 생일을 기억해 미역국을 끓여주고 케이크를 선물합니다. 조경에도 신경을 써서 아름다운 공장을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숙사도 마련했지요. "
▼그런 노력을 하시니 많이 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총무 담당 직원은 전문대 등을 찾아다니며 졸업생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게 일입니다. "
▼열처리 분야에선 숙련도가 중요하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금속의 적정 열처리 온도 등은 학술적으로 정립돼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크기와 특성을 지닌 금속을 어떤 환경에서 몇 시간 열처리를 해야 하는지는 현장경험을 통해 터득하는 것입니다. 저는 45년 동안 이 분야에서 일을 한 덕분에 5도의 오차를 눈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
▼한국열처리는 정년이 없는 업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우리 회사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습니다. 60세가 넘는 사람이 모두 9명이나 됩니다. 전체 직원의 10%가 넘지요. 베테랑도 많습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많이 와야 하는데…."
▼열처리산업이 왜 중요합니까.
"항공기가 착륙하다가 랜딩기어가 부러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륙 후 엔진이 고장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들은 모두 금속으로 돼 있고,이들 금속은 대부분 부드러운 상태에서 가공한 뒤 열처리를 통해 수십배 수백배 단단해집니다. 열처리는 기계 금속 자동차 조선 항공산업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기반기술이라고 합니다. 이 기술은 도제식으로 전수할 수밖에 없어 일일이 현장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기본 기술을 익히는 데만 5년 정도 걸립니다. 장인으로 탄생하려면 적어도 15년에서 20년 정도 배워야 합니다. "
▼국내의 열처리산업은 어떤 상태인지요.
"600~700개의 열처리 전문업체가 경인과 영남 지역에 산재해 있습니다. 대형 부품은 자동차업체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이 직접 열처리합니다. 하지만 직접 작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소형 부품이나 특수 가공을 필요로 하는 부품은 열처리 전문업체에 맡깁니다. 이들은 직원이 보통 10~20명에 불과할 정도로 영세합니다. 전체 시장 규모도 1조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임가공료를 기준으로 매출을 잡기 때문이죠."
▼열처리 분야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법대를 다녔지만 고시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됐지요. 당시에 노력했으면 은행에 들어갈 순 있었겠지만,덩치 큰 사람(이 회장은 키 177㎝에 한때 몸무게가 105㎏에 이를 정도의 거구였다)이 쭈그리고 앉아서 주판알을 튕길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던 차에 1965년 한 · 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방한한 일본열처리조합 이사장이 한국인 1명을 데려다 키우겠다고 제안했는데,이게 어떤 경로로 저와 연결됐어요. 저는 열처리가 뭔지도 모른 채 해외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신청했지요. 실업자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됩니까. "
▼어디서 열처리를 배웠습니까.
"일본 혼슈 기후현에 있는 일본공구에서 연수를 받았습니다. 기후현의 남쪽엔 나고야와 도요타가 있어 이들과 함께 중부지방의 핵심 공업지대를 이루는 곳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마스터하자는 욕심에서 잠도 자지 않은 채 36시간 연속으로 열처리 작업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열처리로 앞에서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저를 동료가 앰뷸런스를 불러 싣고 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기술 습득에 목마른 나머지 간호사 몰래 바늘을 뽑고 공장으로 달려오곤 했지요. "
▼귀국 후 바로 창업했나요.
"일본공구 사장이 귀국할 때 설비기술자를 한명 붙여줬어요. 작은 열처리로를 만들 수 있게 도와준 거지요. 그래서 일본인 기술자 1명을 데리고 서울 성수동에서 창업했습니다. 청계천에 나가 파이프와 붉은 벽돌을 구해 작은 열처리로(爐)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한국열처리의 시작입니다. "
▼얼마나 더 현장에서 뛰실 계획인지요.
"요즘은 여기저기가 아파서 병원엘 자주 다닙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공장을 지켜야지요.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후진을 양성하다가 현장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창원과 완주공장을 다녀옵니다. 보통 서울 서초동 집에서 고속터미널로 가서 오전 6시10분 창원행 고속버스를 탑니다. 창원 공장에서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을 먹고 고속버스로 전주를 거쳐 완주로 갑니다. 역시 일을 마친 뒤 저녁에 서울로 올라가지요. (줄잡아 한번에 400㎞이상을 다니며,연간으로는 이동거리가 10만㎞가 넘는다)"
▼열처리 업계나 산업정책 담당자들에게 건의하고 싶은 사항은.
"저는 일본에서 용돈 정도 받으면서 일했습니다. 그래도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월급과 보너스를 준대도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청년들의 잘못된 인식도 있지만,그들 부모의 잘못도 있습니다. 우리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대장장이'로 만드느냐며 '당장 그만두라'고 호통을 친다는 겁니다. 열처리가 3D업종이라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 와보면 깨끗합니다. 정부도 열처리나 도금 염색 주물 단조 등 열악한 업종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인들에게 표창장을 많이 줘야 합니다. 이건 돈이 드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 중소업체에서 15~20년가량 장기 근속한 근로자에겐 주택청약 시 우선권을 주는 등 희망을 줘야 합니다. 그래야 산업의 뿌리가 더욱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