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성의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축제 총감독을 57년간 맡으며 '바그네리안(바그너 음악 애호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볼프강 바그너가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전설적인 지휘자 카를 뵘의 1966년판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니벨룽의 반지' 연주 등의 산파 역할을 했던 바이로이트의 상징적인 인물이 역사의 한장면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21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손자로 세계적인 음악 축제,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총감독을 57년간 맡아왔던 볼프강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볼프강 바그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존폐의 위기에 처했던 바그너 음악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음악축제를 상업적으로도 성공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후 독일에서는 바그너 음악 연주가 상당 기간 금기시됐다. 나치에 협조했던 음악가들도 발이 묶였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찬양한 바그너 음악에 심취했고 나치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바그너 음악이 활용됐다는 게 이유다.

천신만고 끝에 1951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가 재개됐을 때 볼프강은 형인 비란트 바그너와 함께 축제 총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지휘계의 거장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빌헬름 푸르트벵글러(니벨룽의 반지),한스 크나퍼츠부쉬(파르지팔),카를 뵘(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기념비적인 바그너 연주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형과 함께 현대적이고 전위적인 연출을 바그너 악극에 도입,바그너 애호가들의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왔다.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이와 관련,슈피겔은 "볼프강은 어떤 조직을 일구고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었다"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오랜 세월을 같이한 볼프강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뤘다"고 평가했다.

볼프강 바그너는 형이 1966년 사망한 이후 2008년까지 단독으로 축제 총감독직을 맡으며 바이로이트에 지속적인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57년 재임 기간 1700여회에 걸친 바그너 공연을 이끌었고 현대적이며 극단적인 연출 실험을 계속했다.

1972년 괴츠 프리드리히의 '탄호이저'나 1988년 해리 쿠퍼의 '니벨룽의 반지',1993년의 하이네 뮐러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은 당대 최고의 화제를 모으며 세계 공연사의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과 몇년 만에 축제의 옛 명성을 살리고 반세기 동안 상업적인 성공을 이뤄내자 볼프강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해마다 여름이면 바이로이트 축제 공연표를 구하려고 전 세계에서 '표구함(Suche Karte)'이란 팻말을 든 인파가 몰려들 정도였다. 향후 10년치 공연분인 5만석이 예약 만료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볼프강은 또 축제에 대한 정부지원을 이끌어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 매년 독일 정부로부터 550만유로(약 84억원)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축제를 반석에 올려놓은 볼프강의 말년은 순탄치 못했다. 말년에 그의 축제 운영은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들었고 바그너 가문에서도 축제 운영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다.

2008년 그가 축제 총감독직을 물러나면서 분쟁은 더욱 거세졌다. 총감독직 후임을 놓고 볼프강의 전처 소생인 딸 에바와 후처 소생 카타리나 간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다. 몇년 간의 분쟁과 독일 정부의 개입 끝에 결국 에바가 후임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생전에 볼프강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때 나는 반동주의자로도 불렸고,나중에는 혁명가로도 평가됐다"고 말했다. 이제 그의 사망에 따라 그가 과연 보수적인 조직운영가였는지,혁명적인 연출가였는지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졌다는 게 독일 언론들의 분석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