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립 화승그룹 회장(60)에게 돼지국밥은 인생 변곡점들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다. 부도 회사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전 재산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기로 결심했을 때도,1200명 직원을 300명으로 줄이면서 눈물을 쏟아낸 자리에서도,항암치료 중 자정이 넘도록 일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도 그의 앞에는 돼지국밥이 놓여 있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1998년 부도로 만신창이가 됐던 화승그룹은 고 회장의 고군분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도 당시 8400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지난해 약 2조7000억원으로 3배 넘게 늘었다. 사업 영역도 과거 신발 제조에서 스포츠 패션브랜드,자동차 부품,정밀화학,무역 등으로 다각화해 22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거듭났다. 고회장은 화승그룹을 살려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7일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다

'르까프','월드컵' 등 스포츠 용품 브랜드로 유명했던 화승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채권 은행들의 자금 회수를 견디지 못해 부도가 났다. 당시 그룹 오너인 현승훈 회장은 섬유 관련 계열사인 화승T&C의 고영립 사장에게 ㈜화승과 화승상사의 대표를 맡겼다.

회사 대표를 맡고 속을 들여다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위기에 처한 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악조건은 죄다 가지고 있었던 것.자금은 없고 매출은 떨어지며 재고는 쌓이고 있었다. 여기에 '누가 누가 잘린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아 직원들 사기까지 바닥이었다. 그는 직원들 사기를 끌어올리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직장 생활을 통해 터득한 진리 중 하나는 '윗 사람들이 자기 몸 사리고 잇속부터 챙기는데 아랫사람들이 따를 리 없다'는 것.고민 끝에 자신의 전 재산을 맡기고 회사 운영자금을 빌리자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퇴근길에 평소 자주 가는 시장통 돼지국밥 집으로 아내를 불렀다.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맛있게 국밥을 먹는 아내에게 회사 사정을 설명하면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반평생을 몸 바친 회사인데 망하게 됐으니 이해해 달라는 얘기에 아내는 '그렇게 하이소'라며 선뜻 따라 줬다. 곧바로 아파트와 부동산 등 전 재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9억3000만원을 빌려 회사 운영자금으로 썼다.

◆20년지기 직장 후배를 떠나보내다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놨다는 얘기에 직원들은 눈빛부터 달라졌다. 모든 걸 걸고 회사를 살리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 사장은 각 부서의 부 · 차장급 간부들을 불러 놓고 사업분야가 겹치는 두 회사를 합치고 인원감축을 단행하는 구조조정안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1200명이 넘는 직원을 300명 이하로 줄이는 고통스런 작업이었다. 옆 자리에서 일하던 직원이 다음 날 부서가 없어졌다며 짐을 싸는 일이 허다했다.

고 사장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하나의 원칙만은 반드시 지켰다. 두 사람의 능력이 비슷한 경우 자신과 같이 일해보지 않았던 사람은 남기고,오히려 친분이 있는 직원을 그만두게 했다. 대규모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큰 반발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공평무사'의 원칙 덕이었다. 그러다 보니 20년 넘게 함께 일한 부하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읍참마속'의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 직원을 떠나 보내는 석별의 자리에서도 돼지국밥과 소주가 놓였다.

◆심장을 아웃소싱하다

고 회장은 한 가지 일에 빠지면 곁을 보지 않고 몰두한다. 회사 회생을 위해 정신없이 일하던 2004년,그는 샤워를 하던 도중 겨드랑이 밑에 혹이 만져져 병원에 갔다. 의사의 진단은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3개월밖에 못 산다는 말에 그는 절망했지만 '회사는 살리고 죽어야 된다'는 생각에 바로 수술을 받았다. 독한 마음으로 한 달반의 집중 치료를 거친 뒤 그는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회생의 문턱에 서 있는 회사를 살리는 일이란 생각에서다. 다행히 수술경과는 좋았고 술을 끊고 운동과 통원치료를 병행한 끝에 그는 회사와 자신을 모두 살릴 수 있었다.

고 회장의 이 같은 성격은 화승그룹의 회생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르까프를 살리기 위해 그는 의류 브랜드의 핵심인 디자인을 외부업체에 맡겼다. 내부에 디자인팀이 있다 보니 적당히 하자는 분위기가 만연해 소비자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은 '의류브랜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인을 어떻게 외부에 아웃소싱하냐'며 반발했지만 그는 밀고 나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회사 직원 20명이 하던 일을 12명이 하게 되니 비용도 줄었다. 화승은 르까프 브랜드만으로 현재 월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국내 매출이 회복된 뒤에는 사업 다각화 작업을 벌였다. 국내 판매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외국 스포츠 브랜드의 신발을 생산하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2002년 9월 베트남에 약 43만㎡(13만평)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리복운동화를 매월 120만켤레씩 생산하면서 가동 1년 6개월 만에 흑자를 냈다. 공장의 성공적인 운영 덕분에 법원으로부터 화의절차를 2005년에 조기 종결하라는 결정을 받아내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도 간다

고 회장은 1976년 입사한 이래 34년간 한 직장을 다녔다. 1987년 업계 최연소 이사에 올랐고 이후 ㈜화승의 대표이사를 거쳐 2008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가 사원에서 시작해 회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올빼미'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남들이 어려워하고 피하는 일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의 업무 스타일도 한몫했다. 실제로 그는 요즘에도 매일 새벽 6시면 일어나 출근하고 자정이 가까워야 퇴근한다.

고 회장의 다음 번 목표는 화승을 글로벌 그룹으로 키우는 것이다. 스포츠 패션브랜드,자동차부품,정밀화학 3개 핵심분야의 해외 시장 진출을 확대하는 것이 글로벌화의 핵심 전술이다. 르까프,케이스위스(K-SWISS)를 핵심 브랜드로 가지고 있는 스포츠 패션브랜드는 장차 '나이키'수준의 브랜드 파워를 목표로 잡고 있다.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인 화승R&A도 도요타,GM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납품 비중을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덧 34년이 됐네요. 별 다른 비결은 없어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실패하고 어려워하는 일을 도맡아 한 것뿐입니다. 누구나 피하는 일을 계속 맡다보니 성취감,보람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줬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날들이었죠.후회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화승을 키우기 위해 전력으로 일할 겁니다. 화승은 제 청춘을 모두 바친 회사잖아요. "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