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을 따르는 옷은 세 차례에 걸쳐서 팔린다. 처음 나와 새로운 유행을 형성하면 매우 높은 값을 매겨도 잘 팔린다. 그러나 한 차례 초기 매출의 바람이 가라앉고 나면 애초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것이 유행의 속성이다. 그렇게 되면 가격을 상당히 할인하여 판매하는 2차 매출인 '대봉사 바겐세일'이 시작된다. 그래도 팔리지 않고 남은 옷은 마지막 제3단계의 재고정리 매출에서 아주 싼 값에 처분된다.

공장 출고 때의 옷값을 100이라고 할 때, 이 단계별 판매가격을 평균한 값은 얼마나 될까? 품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250 정도 된다고 한다. 제조단계에서 생산한 가치가 100인데 비하여 유통단계는 150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제조단계보다 유통단계에서 일하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유통단계에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한다는 사실이 크게 의외는 아닐 것이다. 전체 GDP에서 2차산업의 비중이 40% 정도인데 비하여 3차산업은 56%에 이르는 우리나라 산업구조도 이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가 입는 것은 결국 공장에서 생산한 옷이다. 사람들이 특정한 옷을 좋아하는 까닭은 공장에서 이 옷을 잘 만들었기 때문이지 유통단계가 많은 가치를 생산했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옷에서 유통단계의 마진이 하락하면 하락할수록 오히려 최종 판매가격은 낮아지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더 좋다.

도요타 자동차의 물류전략은 결국 같은 품질의 자동차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물류비용을 줄이는, 즉 '유통마진'을 줄이는 전략이었다. 제조 단계의 원가절감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런 다음 전략은 유통과정의 합리화다.

재고관리, 대량구매, 그리고 특성화 판매 등 유통과정을 관리하는 기술과 경영기법은 최근 들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재래시장의 전통 상인들은 신 유통기술의 등장에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자고로 상인들은 다른 상인들이 자신들의 시장에 침투해 오는 것을 결사적으로 저항한다. 그 결과 형성된 균형이 각자 다른 이들의 영역을 서로 존중하면서 자신의 시장을 지키는 지금의 모습이다.

유통과정은 이처럼 시장경쟁이 가장 제한된 곳이다. 농수축산물은 산지가격이 떨어져도 소매가격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데, 그 까닭은 폐쇄된 독과점적 유통과정 때문이다. 악명 높은 권리금 관습도 이러한 유통과정의 산물이다.

새롭게 등장한 대형 할인마트와 편의점은 전근대적 유통과정에 일대 혁신을 불러오고 있다. 싼 값과 선택의 폭이 넓어진 소비자들로서는 대환영이다. 그러나 이 변화에 대한 전통 상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영세상인들은 생존을 내세워 대형 할인마트 입주에 결사적으로 저항한다. 정치인들은 툭하면 재래시장에 나타나 인간미 넘치는 시장의 존속과 영세상인의 생존권 보장을 역설한다. 그러나 그 보다는 영세상인들을 규합하고 이들이 합동으로 출자하여 그 지역 대형 할인마트와 편의점 체인에 직접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옳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