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버냉키 연출 '논픽션 경제드라마' 결말은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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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 버냉키와 금융전쟁 | 데이비드 웨슬 지음 |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 | 496쪽 | 2만5000원
● 초짜 버냉키의 위기 속 분투기
학자에서 연방준비위원장으로
말실수·리먼 파산 악재 거치며
일관성 있는 리더십 발휘
● 초짜 버냉키의 위기 속 분투기
학자에서 연방준비위원장으로
말실수·리먼 파산 악재 거치며
일관성 있는 리더십 발휘
1920년대 대공황 이후 거의 100년 만의 대재앙이라고 표현되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계경제는 걱정하던 것보다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1997년 금융위기 경험과 각국 정부의 발빠른 공조가 큰 밑거름이 됐다고 본다.
이번 금융위기에 누구보다도 땀을 많이 흘려야 했던 인물은 바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벤 버냉키 의장이다. 《살아있는 역사,버냉키와 금융전쟁》은 이번 금융대참사의 소방관이었던 그가 겪은 '위기 속 분투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낸 책이다. 저자인 월스트리트저널의 경제 담당기자 데이비드 웨슬은 퓰리처상 수상자답게 제목도 절묘하게 붙였다. 영문판 제목인 'In Fed We Trust(우리는 중앙은행을 믿는다)'는 미국 지폐에 있는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빌린 것이다. 금융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아니라 중앙은행이었던 아이러니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책의 주인공 버냉키는 실존 인물이다. 따라서 줄거리에 보이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논의들은 이번 금융위기의 한 가운데서 가장 첨예하게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실제 사례다. 데이비드 웨슬은 특유의 정중하고 사려 깊은 묘사와 설명을 통해 당시 연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큐멘터리처럼 생동감 있게 들려준다. 냉철한 평가도 잊지 않는다.
버냉키는 임기 초반에 크고 작은 실수를 했다. 이 실수는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같은 큰 악재와 겹쳐 증폭되기도 했고,민감한 언론 인터뷰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워낙 장기간 집권했던 앨런 그런스펀 전 의장의 스타일에 길들여진 모든 연결 고리들은 금융위기를 맞아 혼란에 빠지고 만다.
책 속에서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 움직이는 버냉키의 캐릭터는 17년간 대공황을 연구해온 학자로서 조용하며 진지하고 정직하게 묘사된다. 이런 캐릭터가 점점 여러 곤란과 시련에 빠지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 총재로서의 영향력을 깨달아 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 깊다. 단순히 연준 의장으로서 현황을 파악하는 수준이던 그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발빠른 합의와 의사결정을 이끌어내고 실행에 옮긴다.
이 책에는 버냉키를 비롯해 헨리 폴슨 · 티모시 가이트너와 같은 미국 재무부 장관,앨런 그런스펀 · 도널드 콘 · 케빈 와시와 같은 연준의 핵심 인물,JP모건체이스 · 씨티그룹 · 베어스턴스와 같은 대형 금융그룹사의 CEO 등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미국만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책을 그저 버냉키 의장의 성공기 정도로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금융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걸음마를 떼고 있는 중이다. 금융 선진국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꼽으라면 각 부문들이 스스로의 역할과 기능을 잘 이해해야 하고,더 나아가서는 여타 부분들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 · 의회 · 중앙은행 · 민간 대형 금융사들,세금을 내는 국민들 모두가 서로 간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할 것이며,어느 방향으로 지향점을 선정할 것인지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금융의 역사는 조직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실행이라는 테두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최대 금융 선진국에서 발생한 대형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근접 촬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토론과 향후 연구의 불씨들을 발견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과연 어디까지 대마불사의 논리를 적용할 것인가. 적정 수준의 유동성을 관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가. 어떻게 하면 자산가격의 거품과 금융위기를 사전에 인지할 수 있는가. 저금리 · 고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규제강화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뉴 노멀(New Normal) 시대'가 오면 중앙은행의 역할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버냉키가 경제학자로 활동하던 시절 논문에 '대공황을 이해하는 것은 거시경제학의 성배(聖杯)다'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이 말을 이렇게 고쳐 보고 싶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버냉키를 이해하는 것은 거시경제학의 성배다. '
홍승제 <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