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두 벌거벗고 다닌다면 얼굴의 아름다움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평소 생각했다.(터키의 목욕탕에 들어서보니)그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얼굴이 예쁘지 않더라도 피부가 곱고 몸매가 우아한 부인들에게 더 많은 찬탄을 나 자신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몽테규 부인,동방서간집)



메리 워틀리 몽테규 부인(1689-1762)은 서구 여성 최초로 터키를 여행한 인물이다. 1716년 남편이 오스만투르크 주제 영국 대사로 근무하게 되자 1718년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현지 문물을 관찰한 뒤 영국으로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오스만투르크로의 여정과 신비로운 동방문화에 대한 묘사가 담긴 몽테규 부인의 ‘서간집’은 서구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후일 ‘오리엔탈’ 예술을 촉발하는 매개가 됐다. 사회적으로는 오스만투르크에서 우두법이 널리 시행되고 있는 점을 전해 제너의 종두법을 이끌어냈다는 평도 듣는다. 또 몽테규 부인의 뒤를 이어 오스만투르크 등 중근동으로 탐험을 떠나는 여성들도 늘게됐다고 한다. ‘박세리 키즈’나 ‘김연아 키즈’처럼 당시 영국에선 중동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지닌채 탐험에 나서는 열혈여성들이 몽테규 부인덕에 양산된 것이다.

몽테규 부인의 서간집 중 특히 1717년 4월 1일 오전 10시경 방문해 묘사한 오스만투르크의 ‘터키탕’묘사는 묘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몽테규 부인에 따르면 여자들로 가득차 있는(당연히 남탕은 못들어 갔을터) 터키탕은 대리석이 깔려 있고 목욕탕 가를 따라 빙 둘러서 두층으로 대리석 의자가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방안에 있는 네개의 분수에서 뿜는 찬물은 대리석 욕조에 떨어졌다가 바닥에 파놓은 홈을 따라 옆방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이어진 옆방에선 뿜어나오는 유황증기 때문에 너무 더워서 “옷을 입고 있을 수 없었다”고 묘사된다. 옆에 열탕에선 찬물꼭지가 설치돼 목욕하러 온 여인들이 적당한 온도로 조절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수백년전 오스만제국의 목욕탕이 요즘 간혹 이용하는 동네 목욕탕보다 시설이 훌륭한 듯 하다.)

부인은 목욕하는 여인들에 대해선 “모두 천연복장,즉 홀랑 벗고 모든 결함과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지만 점잖지 못한 미소나 부적절한 행동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또 “그렇게 많은 훌륭한 여인들이 벌거벗은 상태로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어떤 사람은 일을 하고,어떤 사람은 셔벗이나 커피를 들고,또 어떤 사람은 하녀가 몇가지 예쁜 모양으로 머리를 땋아주는 동안 쿠션위에 무심히 누워있는 등 여러가지 자세를 취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몽테규 부인은 터키탕에 여행복장인 승마복을 입고 들어갔는데 유일하게 옷을 걸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부인은 당시 상황에 대해 “하지만 터키 여인들은 아무도 놀라움이나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친절하고 정중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200여명의 여자들이 있었지만 깔보는 미소를 짓거나 심술궂은 귓속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우리나라에서 복장이 조금이라도 틀린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런 미소나 귓속말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고 전하며 오스만제국 여인들의 고상함과 품격높음을 칭찬하고 있다.

이어 “사려 깊어 보이는 한 부인이 나를 옆에 앉도록 청하고는 나도 옷을 벗고 함께 목욕하기 바란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권하는 바람에 사양하기가 꽤 힘들었다. 끝내는 치마를 열어 코르셋을 보여주니 모두 납득했다. 내가 묶여있는 그 장치는 내손으로 열 수없는 것이라고, 그 장치는 내 남편이 설치해 놓은 것이라고 모두 믿었던 것이다”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몽테규 부인의 편지는 ‘관능적인 동방’이라는 서구인의 편견이 담긴 이미지가 묻어나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지만 후대 제국주의 시대의 ‘역겨운’수준의 오리엔탈리즘에 비하면 비교적 객관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어느정도 수긍할만한 점도 있고,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애정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몽테규 부인의 묘사는 1862년 수에즈 운하 개통 직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선정한 운하소재 서사시 수상작인 보르니에의 시와 비교할 때 똑같이 옷벗은 것을 표현하더라도 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몽테규 부인보다 150여년 뒤 보르니에는 시에서 “조국 프랑스가 보낸 노동자들이여/세계를 위해, 이 새로운 길을 열어라!…세계를 위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위하여,/밤의 장막이 내린 흔들리는 나라들을 위하여/방심치 못할 중국인을 위하여,반나체의 인도인을 위하여…”라고 외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시에선 원시적이고 위험한 야만의 동방에선 이제 고상함과 품격이란 단어는 눈씻고 봐도 찾을 수 없게된 것이다.

요즘 뉴스를 접하다 보면 사회 지도층의 격이 떨어지는 발언들로 인해 시끄러운 경우가 많은 듯 하다.(굳이 어떤 발언이라고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너무 많아서...)정치적 공방이나 권력투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언행은 수준이하로 떨어진 경우가 많다. 같은 누드라도 예술작품이 있고,포르노가 있는데.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높으신 분들,힘있으신 분들의 언행은 제국주의 시대 서구의 쓰레기같은 선전물보다도 격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국격'이란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시점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의 격은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참고한 책>
존 캐리, 역사의 원전, 김기협 옮김, 바다출판사 2006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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