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는 2004년 혈당 측정과 투약 관리 등 의료서비스가 가능한 당뇨폰을 개발했지만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혀 사업을 접어야 했다. 당뇨폰이 의료기기로 분류되면서 전국의 통신사 대리점에서 팔 수 없었던 것이다.

중소 지게차 생산업체인 SM중공업은 2008년 지게차와 트럭을 결합해 '트럭 지게차'를 만들었지만 등록 기준이 없어 아직 제품 승인을 못 받고 있다. 회사 측은 당초 '건설기계'로 등록하려 했지만 담당부처에선 "트럭이 붙어 있으니 자동차 아니냐.특장차 분야로 가보라"며 등록을 거부했다. 제품 승인이 늦어지면서 해외 바이어의 구입 문의가 끊기는 등 손해액만 60억원 이상에 달한다는 게 회사 측의 하소연이다.

업종 간 벽을 허무는 산업 융합이 세계적 추세로 자리잡고 있지만 국내에선 '칸막이식' 법규가 융합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기업들이 쏟아낸 융합 신제품이 관련 법규 미비로 판매가 지연되거나 사장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국내 1346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41%가 융합 제품을 사업화하는 과정에서 시장 출시 지연 등 애로를 겪었다고 26일 밝혔다.

이유로는 '관련 법규 미비'가 25%나 꼽혔다. 융합 촉진을 위한 별도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91.5%에 달했다.

딜로이트컨설팅에 따르면 전 세계 융합시장 규모는 2008년 8조6000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보다 8~9배 크다. 앞으로 시장이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2018년에는 61조달러에 육박할 전망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융합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법규와 정책을 추진해왔다. 미국의 '인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한 융합기술 정책'과 '미국 경쟁력 강화법',유럽연합(EU)의 '유럽 지식사회를 위한 융합기술 정책',일본의 '중소기업 신사업 활동 촉진법'이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의 산업발전법은 철강 자동차 전기전자 등 업종별 산업발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IT(정보기술)와 BT(바이오기술) NT(나노기술) 등 업종 간 결합 추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이에 따라 별도의 '산업융합촉진법'을 만들기로 하고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최경환 지경부 장관은 "지난 25년간 산업발전법 체제를 토대로 한 업종별 산업발전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법은 융합아이템 발굴→융합 R&BD(시장지향적 연구개발) 지원→융합신제품 상용화→융합신제품 시장 활성화 등 발전 단계별로 융합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관계부처 장관이 참여하는 범정부 차원의 산업융합발전위원회도 구성하도록 했다. 칸막이 법규 때문에 제품 승인을 못 받는 일이 없도록 '임시인증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법안은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 소장은 "융합은 산업과 기술을 넘어 학문 예술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며 "정부의 입법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