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피터팬 신드롬' 정부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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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크기 규제하는 나라 없어
中企는 지원꿀맛에 성장정지症
中企는 지원꿀맛에 성장정지症
대기업 집단의 명단이 처음 작성된 것은 40년 전이다. 4대 재벌이니 5대 재벌이니 하는 용어는 이미 옛말이다. 새로운 강자가 출현했다는 뉴스가 끊어진 지도 오래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사라진 이름이 소위 30대 재벌의 절반을 넘는다. 지금 30대 재벌이라는 이름 대신 '상호출자 제한 기업집단'으로 46개 그룹의 1164개 계열사가 지정되어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자산 규모가 5조원을 넘으면 재벌이 된다. 우리가 주유소 간판을 통해 알게 되는 에쓰오일 같은 회사나 시장에 팔려갈 그날을 기다리는 대우조선이나 하이닉스도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투자금융도 이름을 올렸고 세아그룹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알지 못하는 국민조차 많을 것이다. 어떤 회사인지 모르기는 이름을 바꾼 OCI그룹도 마찬가지다. 웅진이나 삼성테스코 STX도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한전 토공 같은 공기업이 숫자의 상당 부분을 채운다.
50대 기업이다 100대 기업이다 하는 명단에 올랐다면 그것만으로도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니다. 이 명단에 들어가기를 어떤 기업도 결코 원치 않는다. 정부가 악당 수배자 명단을 발표하듯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명단에 오르는 순간 기업들은 30개 법령에 걸쳐 50개에 가까운 규제를 새로 받게 된다. 그래서 갖은 방법으로 이 명단에 들기를 피한다. 출자 규제에서부터 의결권 제한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국에만 존재하는 수많은 규제가 새로 적용된다. 지주회사 부채비율을 규제받고, 심지어 사모펀드 포트폴리오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없다. 사돈의 팔촌인 주주 명단까지 추적당해야 한다. 어떤 경제력 집중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지 또 규제를 촘촘하게 만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삼성이나 현대차 같은 대기업들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새로운 재벌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재벌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면 한국 대기업들은 모두 이 증후군의 볼모다. 그리고 정부는 피터팬을 만들어 낸다.
또 다른 피터팬들은 중소기업들이다. 중소기업들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않기 위해 회사를 분할하는 등 갖은 방법을 쓰고 있다. 97년 이후 중소 중견 기업 중에서 대기업으로 새로 성장한 곳은 풍산 오뚜기 이랜드 3개사밖에 없다. 중소 기업이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순간 세제와 금융 지원이 끊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금 80억원, 종업원 800명 이하의 턱 밑에 모여 옹기종기 '오로지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애로운 정부는 지난주에도 또 꿀 단지를 내놨을 뿐이다. 중소기업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이번에는 중견 기업에까지 특혜를 연장했다. 모순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자산 5조원의 턱밑에 옹기종기,그리고 자본금 80억원 · 종업원 800명 이하에 올챙이들처럼 우글거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기업 생태계를 만든 것은 정부다.
대기업이 되는 순간 세계 최강의 규제가,그리고 중견기업으로 발을 딛는 순간 각종 혜택의 취소라는 자동기계가 작동하고 있다. 이 낡은 기계를 뜯어 내지 않으면 기업 생태계는 피터팬의 전시장이다. 길면 잘라내고 짧으면 잡아 늘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한국에서는 신화가 아니다. 며칠 전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 규제는 철폐되어야 하지만 아마도 20년이나 30년 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30년 후라니! 우리는 이 말에 대해 "그래, 인간은 장기적으로 모두 죽는다"고 응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강력한 중견기업과 세계적 대기업이 새로 출현하는 일은 공정위원장의 생각대로라면 우리 생애에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규재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50대 기업이다 100대 기업이다 하는 명단에 올랐다면 그것만으로도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니다. 이 명단에 들어가기를 어떤 기업도 결코 원치 않는다. 정부가 악당 수배자 명단을 발표하듯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명단에 오르는 순간 기업들은 30개 법령에 걸쳐 50개에 가까운 규제를 새로 받게 된다. 그래서 갖은 방법으로 이 명단에 들기를 피한다. 출자 규제에서부터 의결권 제한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국에만 존재하는 수많은 규제가 새로 적용된다. 지주회사 부채비율을 규제받고, 심지어 사모펀드 포트폴리오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없다. 사돈의 팔촌인 주주 명단까지 추적당해야 한다. 어떤 경제력 집중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지 또 규제를 촘촘하게 만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삼성이나 현대차 같은 대기업들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새로운 재벌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재벌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면 한국 대기업들은 모두 이 증후군의 볼모다. 그리고 정부는 피터팬을 만들어 낸다.
또 다른 피터팬들은 중소기업들이다. 중소기업들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않기 위해 회사를 분할하는 등 갖은 방법을 쓰고 있다. 97년 이후 중소 중견 기업 중에서 대기업으로 새로 성장한 곳은 풍산 오뚜기 이랜드 3개사밖에 없다. 중소 기업이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순간 세제와 금융 지원이 끊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금 80억원, 종업원 800명 이하의 턱 밑에 모여 옹기종기 '오로지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애로운 정부는 지난주에도 또 꿀 단지를 내놨을 뿐이다. 중소기업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이번에는 중견 기업에까지 특혜를 연장했다. 모순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자산 5조원의 턱밑에 옹기종기,그리고 자본금 80억원 · 종업원 800명 이하에 올챙이들처럼 우글거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기업 생태계를 만든 것은 정부다.
대기업이 되는 순간 세계 최강의 규제가,그리고 중견기업으로 발을 딛는 순간 각종 혜택의 취소라는 자동기계가 작동하고 있다. 이 낡은 기계를 뜯어 내지 않으면 기업 생태계는 피터팬의 전시장이다. 길면 잘라내고 짧으면 잡아 늘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한국에서는 신화가 아니다. 며칠 전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 규제는 철폐되어야 하지만 아마도 20년이나 30년 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30년 후라니! 우리는 이 말에 대해 "그래, 인간은 장기적으로 모두 죽는다"고 응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강력한 중견기업과 세계적 대기업이 새로 출현하는 일은 공정위원장의 생각대로라면 우리 생애에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규재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