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본토에서 쇼핑 온 관광객들이 워낙 많아요. 물건이 없어 못 파는데 굳이 세일할 이유가 없죠."

금요일인 지난 26일 오후 8시반.한국에서는 쇼핑하기에 다소 늦은 시간이지만 홍콩 최대 쇼핑거리인 침사추이는 여전히 인파로 북적였다. '샤넬' 매장 앞에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10여명의 중국인 관광객들과 실랑이하느라 진땀을 빼던 보안요원은 세일 여부를 묻는 쇼핑객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침사추이의 명품 매장들은 매년 초 겨울 축제와 맞물려 열었던 '메가 세일' 행사를 올해는 그냥 건너뛰었다. 판매할 제품이 부족해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위축됐던 홍콩 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다. 중국을 등에 업고 '아시아 금융허브'로서 위상을 되찾고 있다. 2008년 이후 5분기 연속 마이너스였던 홍콩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작년 2분기 상승 반전에 성공했고,올해는 4~5% 수준을 회복하며 2007년(6.4%) 수준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광해 홍콩영사관 재경관은 "홍콩 경제가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지난달 실업률이 1년반 만에 최대폭 하락할 정도로 급속히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하반기 5.4%까지 치솟았던 홍콩의 실업률은 지난달 4.6%로 2008년 12월(4.1%)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국인들이 뭉칫돈을 들고 대거 홍콩으로 넘어오면서 부동산 시장과 물가가 들썩이고 있다. 부동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은영씨(47)는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몇몇 지역의 35평짜리 아파트 매매가가 작년에 900만홍콩달러까지 떨어졌다가 금융위기 이전 수준인 1500만홍콩달러 선을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홍콩은 양도소득세 등 세금 부담이 작은 데다 현금으로 650만홍콩달러 이상의 부동산을 살 경우 영주권을 줘 중국인들이 싼 이자로 대출받아 싸들고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귀띔했다.

시내 상점에서 만난 한 교민은 "세일은커녕 30~35홍콩달러였던 5㎏짜리 쌀값이 1년 새 70홍콩달러로 뛰었다"며 "경기가 회복되면서 벌써부터 물가도 슬금슬금 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홍콩의 부활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움직임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IB들의 '구인난'이다.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IB들이 올 들어선 공격적인 확장에 나서면서 인력 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글로벌 헤드헌팅업체인 유로서치 홍콩사무소의 김형수 상무는 "바클레이즈 등 일부 업체들은 이미 지난해 감원한 규모만큼 인력 충원을 완료한 것으로 안다"며 "이달이면 지난해 결산을 근거로 한 IB들의 성과급 책정이 모두 끝나는 터라 팀 단위의 대규모 인력 이동도 빈번하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금융위기로 성과급을 동결하거나 줄인 곳이 많아 올해 자리를 옮긴 인력들의 경우 몸값이 평균적으로 30%가량 올랐다.


최근엔 세일즈 인력은 물론 IB 업무를 담당할 인력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리먼 사태 이후 급감했던 기업공개(IPO)가 회복되면서 IB 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연간 IPO 규모는 2007년 375억달러에서 2008년 85억달러로 80% 가까이 급감했다. 하지만 지난해 272억달러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중국 기업들을 중심으로 신규 상장된 기업 수만 63개에 달했다. 올해도 이달까지 IPO에 성공한 8개사를 포함해 60여개사가 홍콩 증시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 외국계 IB 고위 임원은 "중국 정부가 일부 기업에만 허용했던 홍콩 내 위안화 채권 발행 허용 범위를 확대하기로 해 향후 채권 발행 수요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라며 "중국 투자를 겨냥한 글로벌 자금의 홍콩 유입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돼 이에 대한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IB들의 고객 확보 경쟁도 다시 불붙었다. 지난 주말 열린 홍콩판 슈퍼볼인 '세븐스'는 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아시아 지역 IB들의 성적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로 유명하다. 지난해엔 IB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VIP석에 빈자리가 많았지만 올해는 맥쿼리가 처음으로 부스를 마련하는 등 자리 경쟁이 치열했다는 후문이다. 대회 개막 전날인 지난 25일 찾은 홍콩섬 최대 유흥가 란카이펑엔 수백여명의 외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마치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최 재경관은 "과거 유럽이 쥐고 있던 홍콩 IB 시장의 주도권이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계로 넘어오고 있는 분위기"라면서 "'차이나머니'의 지속적인 유입이 홍콩의 경기 회복을 뒷받침할 것"으로 내다봤다.

홍콩=강지연 기자 sere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