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솔라리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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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어느 날 미국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 3층 솔라리엄(Solarium)룸.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국방장관 덜레스가 단 둘이서 긴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 이후 이 방에선 안보정책 보좌관 회의가 수시로 열렸다. 그리곤 3개월이 채 못돼 현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시작됐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소련을 비롯한 대 공산권 정책의 장기전략을 다룬 것으로 처음 논의된 방의 이름을 따 '솔라리엄 프로젝트'로 불렸다.
당시 미국의 안보상황은 급박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사망했고,한국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분단된 베를린을 사이에 두고 동서 간 갈등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대소련 정책은 세계적 주목을 받는 사안이었다.
솔라리엄 프로젝트의 주인은 아이젠하워였다. 그는 3개 팀을 구성하고 노련한 군 장성 3명을 팀장으로 선임했다. 각 팀에는 육해공군과 국무성 등 안보 관련 부처 출신 8명을 팀원으로 참여시켰다. 각 팀은 구체적인 미션을 받아 각각의 입장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소련정책 제안을 세웠다.
A팀은 온건파로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지지하는 그룹이었다. B팀은 중도파였고 C팀은 아이젠하워가 대선 후보 당시 내걸었던 롤백(Roll Back ·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범위 안에서 소련의 우방국을 줄여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진공 자세를 취하는 강경책)을 지지하는 강경파였다.
이들은 미국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에서 팀별로 고립된 공간에 갇혀 6주간을 집중적으로 일했다. 브레인스토밍 등 각종 방법을 통해 난상토론을 벌였고 팀별로 단일한 최종 결과를 도출했다. 마침내 이들은 그 해 7월16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최종 발표회를 가졌다. 각 팀은 슬라이드 차트 지도 등 각종 도구까지 사용하며 자기 팀의 정책제안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회의는 하루 종일 계속됐지만 3개 팀의 의견을 하나로 묶어 의견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회의 말미에 아이젠하워가 일어나 45분간 연설했다. 그는 각 팀 발표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히고는 당초 대선공약과 달리 A팀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이젠하워는 앞으로 동맹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전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강경정책을 절대로 추진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 솔라리엄 프로젝트는 결국 구소련이 붕괴되는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냉전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근간이 됐다.
31일 북한경제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룬 국제포럼으로는 사실상 최초로 기록될 '북한 경제 글로벌 포럼'을 진행하면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솔라리엄 프로젝트였다. 지금이야말로 북한을 비롯한 대동북아 정책의 중장기 구상을 만들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좌파 우파 중도파 등으로 나뉘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론이 분열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된다면 북한을 포함한 우리 경제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솔라리엄 프로젝트가 의미 있었던 것은 갈라진 국론을 갈라진 그대로 냉철하게 본 것에 있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그러나 결국 큰 지향점에는 수렴하는 부분이 있음을 전문가들의 논의로 결론을 내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이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프로젝트에 목말라하는 숨은 수요를 확인한 포럼이었다.
권영설 한경아카데미 원장 yskwon@hankyung.com
당시 미국의 안보상황은 급박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사망했고,한국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분단된 베를린을 사이에 두고 동서 간 갈등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대소련 정책은 세계적 주목을 받는 사안이었다.
솔라리엄 프로젝트의 주인은 아이젠하워였다. 그는 3개 팀을 구성하고 노련한 군 장성 3명을 팀장으로 선임했다. 각 팀에는 육해공군과 국무성 등 안보 관련 부처 출신 8명을 팀원으로 참여시켰다. 각 팀은 구체적인 미션을 받아 각각의 입장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소련정책 제안을 세웠다.
A팀은 온건파로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지지하는 그룹이었다. B팀은 중도파였고 C팀은 아이젠하워가 대선 후보 당시 내걸었던 롤백(Roll Back ·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범위 안에서 소련의 우방국을 줄여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진공 자세를 취하는 강경책)을 지지하는 강경파였다.
이들은 미국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에서 팀별로 고립된 공간에 갇혀 6주간을 집중적으로 일했다. 브레인스토밍 등 각종 방법을 통해 난상토론을 벌였고 팀별로 단일한 최종 결과를 도출했다. 마침내 이들은 그 해 7월16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최종 발표회를 가졌다. 각 팀은 슬라이드 차트 지도 등 각종 도구까지 사용하며 자기 팀의 정책제안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회의는 하루 종일 계속됐지만 3개 팀의 의견을 하나로 묶어 의견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회의 말미에 아이젠하워가 일어나 45분간 연설했다. 그는 각 팀 발표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히고는 당초 대선공약과 달리 A팀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이젠하워는 앞으로 동맹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전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강경정책을 절대로 추진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 솔라리엄 프로젝트는 결국 구소련이 붕괴되는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냉전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근간이 됐다.
31일 북한경제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룬 국제포럼으로는 사실상 최초로 기록될 '북한 경제 글로벌 포럼'을 진행하면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솔라리엄 프로젝트였다. 지금이야말로 북한을 비롯한 대동북아 정책의 중장기 구상을 만들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좌파 우파 중도파 등으로 나뉘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론이 분열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된다면 북한을 포함한 우리 경제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솔라리엄 프로젝트가 의미 있었던 것은 갈라진 국론을 갈라진 그대로 냉철하게 본 것에 있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그러나 결국 큰 지향점에는 수렴하는 부분이 있음을 전문가들의 논의로 결론을 내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이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프로젝트에 목말라하는 숨은 수요를 확인한 포럼이었다.
권영설 한경아카데미 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