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의 '드로잉쇼' 전용극장.배우가 캔버스 위로 손을 슥슥 움직이자 18세기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이 단 6분 만에 그려졌다. 말도 없다. 우주 비행 중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설명이나 대사 없이 오직 표정과 연기로 각종 기법의 그림 그리기 과정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 객석에선 '우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관객의 절반은 외국인이다.

'드로잉쇼'와 같은 비언어극 공연(넌버벌 퍼포먼스)이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성공신화를 써온 '난타'를 비롯해 현재 20여편의 비언어극이 상설공연으로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역대 최다 규모다.

특히 지난해 원화가치 하락으로 일본 · 중국 관광객이 크게 늘면서 비언어극도 급증했다. 대사의 장벽이 없어 외국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새로 무대에 올려진 작품만 7~8편에 달한다. 공연 소재도 요리 · 무술 · 춤 · 그림 · 마술 등으로 다양해졌다. 하지만 '난타''점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공연은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한 공연들의 옥석 가리기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공연마다 전용관 갖기 붐='난타'의 기획사인 PMC프러덕션은 지난해 10월 명동 난타극장을 추가로 개관해 서울 3곳,제주도 1곳 등 4곳의 전용관을 갖게 됐다. '점프'(종로 씨네코아 2개관) '사춤'(사랑하면 춤을 춰라,인사동 낙원상가) '드로잉쇼'(대학로) '미소'(정동극장) '판타스틱'(63아트홀) '버블쇼'(명보아트센터) 등도 전용관을 운영하고 있다. 장기 공연장을 갖춘 넌버벌 공연만 11개이며,전용극장을 물색 중인 공연도 적지 않다.

공연기획사들이 적잖은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전용관을 마련하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장기간 안정적인 공연 인프라를 갖추라는 여행사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너도나도 전용관 마련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작년 국내 넌버벌 공연 관객 중 외국인 비율은 무려 60%(80만4600명)에 달했다. 총 외국인 관광객(782만명)의 10%가 공연을 즐긴 반면 내국인 관객(58만명)은 턱없이 적었다.

◆문제는 수익성=다양한 공연이 탄생했지만 대다수 넌버벌 공연 제작사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 30만명을 유치해 200억원의 매출을 올린 '난타'와'점프' 등 몇몇 공연을 빼고는 아직 수익성이 떨어진다.

이들 두 공연이 국내 넌버벌 공연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가량.대다수는 초기 제작비용에다 대관료,인건비,재료비 등 매달 수천만원의 운영비를 감당하기 버거운 상태다. 관객의 입소문을 통해 명품 공연으로 검증받는 데에는 적어도 3~4년이 걸리는 탓에 이를 견딜 수 있는 전략과 체력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1997년 초연한 '난타'는 2000년에야 전용관을 마련했고 이후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선보인 '사춤' 역시 서울 남대문시장의 메사부터 약 4년간 대학로 극장들을 옮겨 다닌 후 2008년 인사동 낙원상가 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사춤'은 지난해 1만6000명(전체 관객의 30%)의 외국인을 끌어들이며 손익분기점에 도달했다.

드로잉쇼도 2008년 중반 첫 선을보인 후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최근 외국인 관객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내수 확대가 관건=당장 넌버벌 공연이 살아남으려면 늘어나는 외국인 관광객에 맞춰 국내 관객 수요도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은 세계경기와 환율에 따라 부침이 심한데다 공연 간 경쟁이 치열해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사춤' 제작사인 두비커뮤니케이션의 김혜진 실장은 "10만명가량에 불과한 국내 뮤지컬 마니아층만 보고 전용관을 마련하는 건 바보같은 일"이라며 "더 많은 국내 관객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공연은 영화와 달리 한 번 만들고 끝내는 게 아니라 1~2년간 꾸준히 무대에 올리면서 반응이 좋지 않은 장면은 손질하는 등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공연을 급조한 후 일단 전용관부터 마련하는 행태는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리하게 공연을 올린 후 저가 티켓으로 타 공연의 관객을 빼앗아오는 데에만 치중하다 보면 정작 완성도를 높이지 못해 외국인 관객들로부터도 외면받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제2,제3의 '난타''점프'를 만들려면 작품성과 탄탄한 내수를 기반으로 한 '명품공연'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