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잘나간다는 'YF 쏘나타'요? 저한테는 이미 옛날차입니다. "

현대 · 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는 이철한씨(49)는 미래를 사는 사람이다. 3~4년 후에 나올 개발 단계의 차량을 몰며 연비와 가속 성능,안전성 등을 시험하는 게 업(業)이다 보니 지금 팔리고 있는 차는 까마득한 제품처럼 느껴진다는 설명이다.

1984년부터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한 이씨가 처음 탔던 차는 '추억의 차'로 기억되는 '포니1'과 '스텔라'.지금까지 현대 · 기아차가 만든 수백 종의 차량이 그의 손을 거쳤다. 수입차를 포함한 다른 자동차 회사의 차들도 대부분 타 봤다.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는 현대 · 기아차 연구 · 개발(R&D) 부서의 원칙 때문이다.

이씨는 "25년간 차를 몰다 보니 이제는 엔진 소리만 들어도 차의 품질과 상태를 알 수 있다"며 "베스트셀러가 될지 여부도 몇 번 타 보면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테스트 드라이버라는 직업이 생소한데.

"자동차 업체 연구소에 소속돼 차량의 품질을 측정하는 전문 드라이버를 뜻하는 말입니다. 활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일반인들을 잘 모르죠.테스트 드라이버들도 소속 부서에 따라 임무가 조금씩 달라요. 제가 소속된 동력 계통 담당 조직에서는 주로 연비와 가속 성능 등을 시험합니다. 팀원이 총 13명이에요. "

▼원래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관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였어요. 입사를 준비하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자동차는 사치품이었어요. 친구들 중에서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도 딱 저 한 명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 자동차 산업이 뜨겠다는 생각이 들어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하면서 실력을 쌓고 제대 후 바로 입사했죠.당시에는 대형 면허가 있고 운전을 잘하면 테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좋아하게 된 것은 입사 이후의 일이에요. "

▼위험한 직업으로 보이는데요.

"운전 전문가들이 일하는 만큼 사고가 나는 일은 무척 드물어요. 시속 200㎞ 이상의 고속 운전도 오래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아찔한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같은 트랙에서 소속이 다른 드라이버들이 함께 테스트를 하다 보면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고속 주행을 하는 일이 있는데 그럴 때가 위기죠."

▼하루 종일 운전을 해야 하나요.

"한번 차에 올라타면 보통 3시간 이상은 운전합니다. 같은 차를 타는 횟수는 수백 번 이상입니다. 부품 하나 교체하고 고속 트랙 한 바퀴 돌고,또 하나 교체하고 다시 한 바퀴 돌고 이 작업이 계속 반복돼요. 고속 트랙만 도는 게 아닙니다. 같은 작업을 서울 시가지처럼 꾸며 놓은 시설에서도 해야 하고요. 자동차 부품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시면 운전 횟수가 계산이 될 겁니다. 탈 때마다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데이터를 뽑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부품을 쓸지를 결정합니다. "

▼25년간 타 본 차가 몇 대나 될까요.

"다 헤아릴 수가 없어요. 한국에서 판매된 거의 모든 차량을 다 타 봤으니까요. 개발 단계에 있는 차를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납니다. '포니1'과 '스텔라' 시절을 지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예요. 요즘 나오는 차들과 비교하면 당시엔 차라고 말하기도 힘든 제품이었죠."

▼개발 단계에서 새 차가 잘 팔리겠다,안 팔리겠다를 가늠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 구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의 성능 부분은 엔진 소리만 듣고도 견적이 나와요. 경험이 쌓이다 보면 차에 대한 본능이 생깁니다. 물론 예측이 틀릴 때도 있죠.과거 '베스트셀링 카'였던 'EF소나타'가 대표적인 사례예요. 출시 전 테스트 드라이버들의 공통된 의견이 '이 차는 아니다'였어요. 디자인에 대한 불만이 특히 많았고요. 아시다시피 결과는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

▼한국 자동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선 게 언제였나요.

"이제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아반떼'와 '쏘나타'부터입니다. 그 무렵을 기점으로 기술 수준이 대폭 높아졌습니다. 최근에 출시된 '제네시스'는 월드클래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차예요. 개발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고 그 결과가 차에 고스란히 반영됐으니까요. '제네시스'가 각국에서 호평을 받을 땐 참 뿌듯하더라고요. "

▼자동차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좋은 차란 뭘까요.

"밸런스가 잘 맞고 안정적인 성능을 내는 차가 좋은 차라고 생각합니다. 연비도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부분이고요. 요즘 소비자들은 대부분 디자인만 보고 차를 고르는데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

▼수입차들에 대한 평가를 내려주신다면.

"유럽 차는 안정성이 뛰어난 반면 승차감이 좀 딱딱해요. 일본 차는 그 반대고요. 개인적으로는 승차감을 중시해서 유럽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럽과 일본 차의 장점을 고루 반영하는 것이 좋은 차를 만드는 비결일 것 같아요. "

▼3~4년 후의 자동차는 어떻게 변할까요.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연비예요. 승차감이나 가속 성능 등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는 만큼 개선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비는 연구하면 할수록 내려갑니다. 미래의 차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연료를 적게 먹을 겁니다. "

▼자동차에 대한 전문지식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전문지식도 쌓이게 됩니다. 차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지고요. 제 경우 자동차 정비 관련 자격증을 대부분 땄어요. 당장 나가서 정비소를 차릴 수 있는 수준이죠.제 차가 고장나면 카센터 대신 부품상에 갑니다. 부품을 구입해 직접 수리를 하면 5분의 1로 비용이 줄어들거든요. 카레이싱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

▼자제분들이 테스트 드라이버가 되고 싶다고 하면 권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미래의 차를 타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상당하거든요.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물론 자동차를 좋아해야 한다는 게 전제입니다. "

▼일반 운전자들을 위한 노하우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연비에 대해서는 사실 모든 운전자들이 해법을 알고 있습니다. 급제동 · 급가속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몰면 연비가 10%가량 줄어듭니다. 그런데 아는 대로 실천하는 분은 많지 않더라고요. (웃음) 새 차를 산 후 길들이는 방법을 잘못 알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차를 뽑자마자 급가속을 하고,시속 150~160㎞ 이상으로 달려도 봐야 차가 제대로 길들여진다는 속설은 거짓말입니다. 처음부터 차를 무리해서 운행하면 부품에 큰 부하가 걸려 악영향을 줍니다. 부드럽고 느리게 운전을 시작하는 게 바람직해요. "

글=송형석/사진=양윤모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