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도안신도시에서 아파트 880여채를 분양 중인 부동산개발회사 K사장은 요즘 보금자리주택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 마케팅 역량을 총 동원해 작년 6월 분양 당시 10%에 그쳤던 계약률을 86%까지 끌어올렸지만 지난달부터 판매가 사실상 올스톱됐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79채,올 1월 34채,2월엔 23채였던 미분양 판매량은 지난달 7채에 그쳤다. K사장은 "미분양 판매에 도움이 되던 수도권 수요자들을보금자리주택이 모두 흡수한 때문"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달의 경우 위례신도시 보금자리주택 사전 예약이 이뤄졌다.

작년 10월 선보인 보금자리주택(무주택 서민을 위한 공공분양 및 임대주택)이 부동산 경기침체와 맞물리며 주택시장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작년 전국 분양주택 38만여채 중 14만채가 보금자리주택으로 공급되면서 미분양 아파트 판매에 급제동이 걸리고 있다. 보금자리와 겹치지 않게 분양시기를 하반기로 연기하는 건설사도 증가하는 추세다. 정부는 분양가 인하 등 자구노력에 나서야 할 민간 건설사들이 값싼 보금자리주택 흠집내기에 나서고 있다며 정책 변화는 없다는 입장이어서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민간주택 분양연기 속출


보금자리주택은 당초 분양가상한제와 부동산 경기침체로 민간주택 공급이 감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됐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주택공급이 크게 줄어 2~3년 뒤인 2001~2002년 집값이 급등했던 전철을 다시 밟아선 안 된다는 우려에서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전국에 12만채에 달하는 미분양 아파트가 있어 주택공급 위축을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경기가 회복될 경우 수급불안에 따른 집값 상승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민간주택 감소를 보완하기보다 오히려 밀어내는 모양새다. 대형 건설사들의 모임인 한국주택협회에 따르면 회원사들이 공급한 아파트는 지난 2월 2216채,3월 3747채로 당초 계획 대비 각각 21%,26%에 그쳤다.

남광토건의 경우 오는 5월 경기 김포시 고촌면에서 분양하려던 아파트 3116채를 7월로 연기했다. 현대산업개발은 지난 2월로 잡았던 김포한강신도시 내 아파트(1205채) 분양 시기를 하반기로,경남기업은 경기 오산시 세교지구 내 아파트(1100채)를 4월에서 하반기로 각각 미뤘다.

◆민간 공급 보완인가,구축(驅逐)인가


민간 건설사들은 분양 연기와 미분양 계약 감소의 원인을 보금자리주택에서 찾고 있다. 반면 정부는 공공주택과 민간주택의 수요층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국민임대→공공임대→공공분양→민간분양'으로 주택수요가 상향이동하는 사다리효과(ladder effect)가 있다는 것이다.

보금자리주택 청약자격이 무주택자에게만 주어지고 서울에서 국민주택규모(전용 85㎡) 당첨을 기대해보려면 적어도 15년 정도 청약저축을 꾸준히 부어야 한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민간 건설사도 보금자리주택처럼 더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면 소비자들이 외면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부동산 업계는 그러나 2012년까지 60만채,2018년까지 150만채로 예정된 보금자리주택 공급량이 주택시장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신조 내외주건 사장은 "보금자리주택이 주변 시세의 50~70%에 분양되다 보니 민간건설업체는 그동안 폭리를 취한 사기꾼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도 "보금자리주택은 도심 접근성과 교외생활의 쾌적함을 동시에 살린 일종의 하이브리드 주택"이라며 "부동산 경기침체도 영향을 줬지만 보금자리주택도 민간분양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2기 신도시에도 '불똥'


2기 신도시 가운데 산업기반 등 자족기능이 없거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김포 검단 양주 평택 등은 보금자리주택에 대해 공포감까지 보이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반경 20㎞ 권역에 있는 보금자리주택과는 경쟁 자체가 안 되기 때문이다.

동탄에 살면서 서울 강남으로 출퇴근하는 김모씨(34)는 "2기 신도시 가운데 경쟁이 치열했던 판교를 제외하고 그나마 직장이 가까운 곳이 동탄이어서 청약했다"며 "보금자리주택의 경우 서울 성남 하남 등에서 훨씬 싼 값에 공급되고 있어 분통이 터진다"고 목청을 높였다.

3차 보금자리지구 중 광명 · 시흥지구는 특히 분당급 신도시로 개발될 예정이어서 2기 신도시 분양과 입주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2기 신도시 가운데 작년부터 분양 중인 김포와 파주지역의 아파트들은 작년 10월 이전엔 청약자가 분양세대보다 많았다. 그러나 이후 미달 단지가 속출했다. 작년 12월 분양한 김포한강신도시 자연&힐스테이트의 경우 1167명 모집에 46명이 청약해 경쟁률이 0.06 대 1에 불과했다.

◆집값 안정에는 기여


보금자리주택이 주택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민간주택업계도 인정하고 있다. 스피드뱅크에 따르면 보금자리주택이 공급된 최근 6개월간 서울 집값은 0.01% 상승했다. 강남구(-0.35%) 송파구(-0.32%) 강동구(-0.26%) 등 강남권과 양천구(-0.52%) 강서구(-0.89%)도 집값이 많이 꺾였다. 신도시는 0.53%,경기도 0.55%씩 내렸다. 곽창석 나비에셋 대표는 "대출규제(DTI)가 수도권으로 확대된 요인이 있었지만 보금자리주택이 본격 공급된 시기와 때맞춰 아파트 값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분양가 거품 해소에 일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보금자리주택과 경쟁을 벌인 신도시에서는 분양가가 낮아진 곳이 적지 않다. 작년 10월 김포한강신도시에서 선보인 성우오스타는 3.3㎡당 분양가가 1203만원이었지만 지난 1월 같은 한강신도시 내 e편한세상은 1047만원에 나왔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