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파탄으로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일본항공(JAL)의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 이나모리 가즈오(77)가 채권단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 압박에 고심하고 있다. 자신의 복안인 '국제선 유지를 통한 회생'과 달리 채권단이 적자 노선을 대폭 폐지해 아시아 특화 항공사로 탈바꿈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59년 27세의 나이에 교토세라믹을 창업해 세계적 종합 전자부품회사인 교세라를 키운 '경영의 신' 이나모리 회장이 일본항공 회생 과정에서 첫 시험대에 부딪힌 상황이다.

일본정책투자은행 미즈호코포레이트은행 등 일본항공의 채권은행들은 현재 60개에 달하는 국제 노선을 20~30개로 줄일 것을 요구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일 보도했다. 현재 적자를 내고 있는 미주와 유럽 노선을 대부분 폐지하고 사실상 아시아에 특화하는 항공사로 탈바꿈하라는 지적이다. 채권은행들은 이 요구사항을 추가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교세라 명예회장이면서 지난 2월1일 일본항공의 회장직을 겸직하게 된 이나모리 회장은 올 여름까지 회사재건 방안을 마련해 채권단과 정부의 인가를 받는다는 목표다. 채권단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일본항공의 회생 노력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단이 과감한 노선 조정을 추가 지원의 조건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문제는 국제선의 대폭 축소가 이나모리 회장의 생각과 다르다는 점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국제선의 사업규모 자체를 축소하지 않고 채산을 맞출 수 있는지 모색하고 있다"며 국제선 노선폐지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국제선은 흑자 달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며 "국제선을 유지한 채로 반드시 일본항공을 재건시켜 보겠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이나모리 회장이 채권은행들의 국제선 절반 축소 요구를 수용할지가 업계의 관심사가 됐다. 국제선 축소는 국제항공사로서 일본항공의 위상이 걸린 데다 경쟁사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국제선 폐지 여부와 별도로 다른 분야의 구조조정은 강력히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지난달 하토야마 총리와의 회식자리에서 "일본항공은 책임경영 체제가 명확하지 않고,기업가 정신이나 경영감각을 가진 인재가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항공의 기업체질과 기업문화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본항공의 현재 체제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지난 2월1일 일본항공 회장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앞으론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한 체질로 바꿔 놓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일본항공 내부에선 2조3220억엔(약 27조9000억원)에 달하는 부채 해소를 위한 대대적인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항공은 본사와 모든 계열사를 대상으로 2700명의 특별 조기퇴직자를 모집 중이다. 일본항공의 경영정상화를 주도하고 있는 기업재생지원기구는 인력 감축과 자회사 매각,자연감소분 등을 포함해 앞으로 3년간 전체 인력의 3분의 1인 1만5700명을 줄인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포브스지 선정 일본 28위 자산가로 뽑힌 이나모리 회장은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유명하다. 특히 회사 조직을 자기 분열하는 아메바처럼 소단위로 나눠서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아메바 경영'을 시행해 교세라를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키웠다는 평가도 받는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경영자의 사람 됨됨이에 달렸다'는 경영철학을 추구해 온 이나모리 회장은 2005년 교세라의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선불교 승려가 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현재 일본의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부터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과는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현재 정부의 행정쇄신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