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기 세아상역 회장(60)은 165㎝의 그리 크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유난히 빠르다. 8층 집무실까지 단숨에 걸어 올라가는 그를 20 · 30대 젊은 직원들도 쉽게 따라잡지 못한다.

남들보다 항상 서너 걸음 앞서 걷는 김 회장의 행보처럼 세계 최대 의류 수출 기업 세아상역의 성장사에는 '고속'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1986년 설립 첫 해 47만달러였던 매출은 지난해 9억2000만달러(약 1조1000억원)로 23년 만에 2000배 가까이 늘었다. 갭 리바이스 자라 아디다스 아베크롬비앤피치 등 40여개 유명 글로벌 의류 브랜드 제품을 생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5개국 21개 공장에선 하루 평균 140만장의 의류를 생산한다.

웃음기 없는 차가운 인상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지만,드럼통 엎어놓고 직원들과 삼겹살 구워 먹기를 좋아하는 소박함도 가지고 있다. 올해 60세의 나이에도 출장 때면 언제나 청바지를 즐겨 입는 그의 옷차림에서 열린 사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장사꾼이 꿈이었던 전라도 토박이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남 지역에서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보냈다. 1~2년마다 근무지를 옮기는 아버지 때문에 전남에선 안 밟아본 땅이 없을 정도였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장사 기질 하나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는 게 김 회장의 어릴 적 기억이다.

중학생 시절 철물점을 하는 친구 집에 놀러 가 친구 부모님이 안 계신 틈을 타 물건을 파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꼭 물건을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가격 흥정을 하든,사달라고 애원하든 반드시 팔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선 의류 쪽에 관심을 가졌다. 웬만한 집이면 재봉틀 한 대쯤은 가지고 있었던 시절,어머니 옆에서 곁눈질로 배운 재봉틀로 직접 바지를 고쳐 입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한 옷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대학 전공으로 섬유공학과(전남대)를 선택한 것도 이런 개인적 취향과 무관치 않았다.

타고난 장사 기질은 숨길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부모님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건축사업을 시작했다. 무작정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1970년대 후반 노후된 시골 집을 개 · 보수해 되파는 이른바 '집장사'가 한창 바람을 타던 때였다. 165㎡(50평) 정도의 땅을 사 그 위에 집을 지어 팔았다. 땅 매입과 설계 의뢰,자재 구입,목수 관리 등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했다. 그렇게 집 세 채를 팔아 큰 돈을 벌었지만 '대학 나와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에 한순간에 사업을 접었다. 나이 많은 목수 · 토수를 부리며 사람 관리하는 법을 배웠고,모든 사업의 기본이 되는 원가 구조를 깨친 기회는 됐다.

◆36세 늦깎이 창업이 인생 전환점

주택 사업을 때려치고 첫 번째로 택한 직장이 앨범 생산업체였던 대봉산업이었다. 회사가 부도 나기 전까지 2년간 기술관리 업무를 맡았다. 두 번째 직장이 의류 수출업체였던 ㈜충방이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의류 시장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생산관리와 영업을 맡으며 물 만난 고기처럼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역시 '샐러리맨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상사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회의를 느끼고 입사 5년 만인 1985년 연말 사표를 던졌다.

그때 나이 35세.네 살,두 살배기 두 딸을 가진 가장으로서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이듬해인 1986년 어지러운 마음에 무작정 마포 공덕동 길을 걷고 있던 그의 눈에 우연히 오피스텔 임대 안내문이 들어왔다. 귀신에 홀린 듯 무작정 사무실에 들어가 임대료를 확인하고 다음 날 계약했다. 18평짜리 사무실에 책상 3개와 전화 · 팩스,김 회장을 포함해 직원 3명.1조원 매출 회사의 출발은 이렇게 단출하고 초라했다.

전 직장에서 쌓아둔 해외 거래선과의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의류 수출 주문을 따냈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수중에 있던 500만원으로는 옷을 만들 원단 구입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부모님 집을 담보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해외 바이어로부터 주문을 받으면 일단 원사를 매입,서울 곳곳에 있던 영세 편직업체에 맡겨 원단을 만들고 염색과 봉제 과정을 거쳐 제품을 실어냈다. 김 회장 스스로도 자신의 인생 불꽃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로 꼽는 때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일하고도 피곤한 줄 몰랐다. 해외 바이어로부터 품질 클레임이 들어오면 더플백 몇 개를 짊어지고 직접 찾아가 바이어와 함께 의류 한 장 한 장을 손수 검사하며 신뢰를 쌓았다.

◆의류 ODM 생산의 선구자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착실히 기반을 닦은 세아상역은 1995년 사이판을 시작으로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회사 규모가 급성장했던 배경에는 과감한 해외 투자가 자리잡고 있다. 국내 경쟁사에 비해 해외 진출은 한발 늦었지만 생산효율이 높은 설비 구축 등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갔다. 1998년 공장을 설립한 과테말라에선 진출 10년 만인 2008년 3억달러의 수출을 기록,과테말라 연간 의류 수출의 21%를 차지하며 1위에 올랐다.

몸값을 노리는 현지 무장단체의 위협 때문에 모든 임원들이 무장 방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사세가 커졌다.

한발 앞선 투자 결정도 주효했다. 미국 의류 쿼터 폐지(2005년 1월1일)를 앞둔 2004년 노동력이 풍부한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을 선매입,대규모 생산 기반을 마련했다. 현재 인도네시아 공장의 수출 규모는 4억달러로 세아상역 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세아상역은 인도네시아 지역에 2015년까지 2억달러를 투자,하루 26만㎏의 원단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공장이 완공되면 연간 6억달러 이상의 원단 판매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회사 측은 보고 있다.

공격적인 해외 투자와 함께 ODM으로의 생산 방식 전환도 세아상역의 성공 비결 중 하나다. 2000년 경쟁사들이 단순 임가공 형태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에 머물러 있었을 때 ODM 방식을 업계에 처음 도입한 게 김 회장이다. ODM은 고객사가 요구한 디자인대로 상품을 생산하는 OEM과 달리 자체 개발한 디자인을 고객사에 역(逆)제안하고 제품을 생산한다. 디자인한 의류에 대해 지식재산권과 독점 생산권을 확보,다른 업체와의 경쟁에 따른 제품가격 하락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게 장점이다.

◆직원 먼저 챙기는 원칙주의자

지난해 세아상역의 입사 1년차 직원 연봉은 인센티브 포함,5000여만원에 달했다. 세아상역이 '섬유업계의 삼성전자'로 불리는 이유다. 직원들의 연봉 수준이 높은 것은 회사의 이익은 주인인 직원들이 나눠 가져야 한다는 김 회장의 원칙 때문이다. '깐깐하다'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도 곧잘 듣는다. 그는 골프장에 갈 때도 기사를 마다하고 직접 차를 운전한다. 골프는 40대 중반에 입문했지만 아직 보기 플레이어에 머물고 있는 것 역시 골프에서 단순히 접대 이외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원칙주의자인 김 회장은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ODM 방식의 의류 수출만으로는 회사 성장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최근 열린 주총을 통해 2006년 인수한 인디에프(옛 나산)의 대표이사에 취임한 것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종합 의류패션 기업을 목표로 삼고 있는 세아상역은 'TATE' 등 독자 의류 브랜드를 선보이며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0년간 축적해놓은 디자인 능력을 기반으로 독자 브랜드 사업을 점차 확대해나갈 생각입니다. 세아상역을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의류패션 기업으로 키워보겠습니다. "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