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고용 세액 공제가 실효성이 없다며 세게 반대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입장이 급선회한 내막이 뭡니까. "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린 지난 2월25일.이혜훈 한나라당 의원(기획재정위 간사)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작년 말 국회에서 중소기업 고용에 대한 세제지원을 "세금만 축내고 일자리 늘리기 효과는 별로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던 윤 장관이 해가 바뀌자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를 따져 물은 것이다. 윤 장관이 대답했다. "그래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

웃으면서 가볍게 대답한 말이었지만 과천 공무원들 사이에선 한동안 화제가 됐다. 윤 장관의 말이 일종의 반어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 논리에 밀려 소신을 접어야 했던 경제관료로서의 비애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요즘 과천 경제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선 "장관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얘기가 심심치않게 나돌고 있다. 정권 창출에 지분이 있는 '실세 장관'과 그렇지 못한 '고용 장관'으로 구분된다는 얘기다.

기획재정부의 한 공무원은 "소신과 능력보다는 정치권과의 역학관계가 우선되는 현실이 전문 관료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밀어주는 인사가 있으면 승진 등에서 유리할 뿐만 아니라 소신있게 정책을 펴는 데에도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관가의 공통된 얘기다.

실제 공무원을 그만둔 뒤 선거 캠프에 뛰어들어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功)을 인정받아 화려하게 복귀한 사례는 이번 정부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겸 대통령 경제특보,윤진식 청와대 정책실장,장수만 국방부 차관 등이 이명박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청와대와 각종 위원회를 포함한 범정부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과감하게 내고 소신있게 일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수만 차관의 경우 작년 8월 예산안 삭감을 놓고 이상희 전 장관과 부딪치자 청와대와 직접 협의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이 전 장관이 청와대에 항의서한을 보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장 차관은 예산안 감축을 관철시켰고 지금도 차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과천 관가 경제관료들 사이에 다음 대선 때는 캠프에 발을 담궈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갈 정도다. 경제부처 한 관계자는 "2012년 말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정치에 줄을 대려는 관료들이 여럿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대통령 선거 무렵에 장 · 차관이 될 만한 지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는 고위 공무원이나 '가'급(옛 1급,관리관) 승진을 기대하는 일부 관료들 정도가 정치판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참 과장만 돼도 선거 캠프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재정부 한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386세대가 득세했고 이들과 직 · 간접으로 연결된 과장급 공무원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승진도 빨랐다"며 "이 때문인지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선거캠프를 뒤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많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분위기가 소신 있게 일하려는 관료들의 의욕을 꺾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공직을 떠난 한 경제관료는 "정치권의 외풍을 타지 않고 전문 경제관료의 길을 걸어가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도 사표를 쓰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털어놨다.

경제 장관들은 또 청와대 산하 각종 위원회와 부딪치면서 무력함을 절감하는 경우가 많다. 정권 실세들이 포진한 각종 위원회는 경제부처보다 상전(上典)으로 정책을 좌지우지해 장관들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역대 경제부처 장관들의 임기를 보면 1년을 넘기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며 "1년짜리 고용 장관들이 소신을 갖고 정책을 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