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리히터 미래경영전략연구소(HORASIS) 회장은 "한국 경쟁력의 핵심은 대기업"이라며 "자동차 반도체 정보통신 분야의 대기업들이 수출을 선도하며 한국의 금융위기 탈출을 앞장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리히터 회장은 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헤쳐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의 올 경제성장률은 최고 5%에 달할 것"이라며 "앞으로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리히터 회장은 "세계 경기 침체는 곧 끝날 것이지만 회복 속도는 더딜 것"이라며 "금융위기 이후 브릭스(BRICs ·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신흥국가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경제질서가 형성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가 부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만큼 한국이 11월 서울에서 개최하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경제포럼(WEF · 다보스포럼) 아시아 담당 이사를 지낸 리히터 회장은 20,21일 한국경제TV와 한경미디어그룹이 주최하는 '2010 세계 경제 · 금융 컨퍼런스'에서 '세계 경제 패러다임 변화 및 출구전략'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최근 세계 경제가 위기 국면에서 벗어나고 있다. 어떻게 전망하는지.

"서방세계는 여전히 금융위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 라트비아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같은 일부 신흥시장도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작년 마이너스 9%를 기록했다. 두바이 위기가 신흥시장의 위기 신호탄으로 작용했다. 경제위기가 확산되는 속도는 지난 수십년에 비해 훨씬 빨라졌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는 불과 한나절 만에 전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는 곧 끝날 것으로 본다. 다만 회복 속도는 더딜 전망이다. "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 판도가 어떨 것으로 예상하는가.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고 있다. 앞으로 서방세계에서는 더 이상 성장 원동력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세계 경제는 브릭스 등 신흥시장이 이끌어 나갈 것이다. 신흥국가들은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 아래에서 중요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서방국가들도 이런 변화를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

▼한국 경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국은 경제위기를 매우 잘 헤쳐 나가고 있다. 올 한국의 GDP 성장률은 3~5%로 예상한다. 달러화를 비롯해 다른 통화에 비해 약세를 보이고 있는 원화 가치가 한국 경제 회복에 도움을 주고 있다. 성장세가 여전히 강한 중국 경제로부터 상당한 이득도 얻을 전망이다. "

▼중국이나 일본과 차별화할 수 있는 한국 경제만의 경쟁력을 꼽는다면.

"한국 경쟁력의 핵심은 대기업들이다. 경제위기가 몰려왔을 때 그들의 저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자동차,평판 디스플레이,메모리반도체,정보통신기기 등 주력 대기업들이 세계 수출시장을 누비며 한국의 경기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 대기업들은 일본 경쟁 회사들과 달리 매우 잘하고 있다. 한국은 앞으로 규모는 작지만 강한,중소기업 분야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히든 챔피언'으로 불리는 독일 중소기업처럼 말이다. "

▼세계적으로 출구전략 논의가 한창인데.

"경기부양책은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지만 재정 비용을 증가시킨다. 장기적으로 볼 때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따라서 경기부양책은 한시적으로만 시행해야 한다. 각국 정부는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구조개혁을 진행하면서 앞으로 6개월가량만 부양책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출구전략도 그와 병행해 고려해야 한다. "

▼한국에서도 출구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는 작년 3분기부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의 경기부양책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재정이 서서히 빠지면서 빈 공간을 민간 부문이 메워주는 게 바람직하다. 위기를 겪으면서 공공과 민간 부문의 파트너십이 강화돼 왔다. 앞으로 이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

▼중국이 통화절상 압력을 받고 있다.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지.

"중국의 통화절상 이슈는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통화 이슈에 따른 무역 분쟁은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권 사이에 끼어 있다. 두 나라의 경제 분쟁 가능성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늘릴 필요가 있다. "

▼한국 경제가 외부 변수에 취약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대책은.

"수출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피하기 위해 지역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금융 부문이 취약하면 경제가 외부 충격에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만큼 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강한 금융 부문은 위기가 오더라도 빠른 회복을 꾀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

▼한 · 중 · 일 3국간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지역 연대로 볼수 있는가.

"물론이다. 한 · 중 · 일 3국이 FTA를 발전시키는 데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매우 결단력있는 행동이다. FTA는 세 나라가 공정하고 자유로우며 개방된 무역 투자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세 나라는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

▼한국이 11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지.

"금융위기를 틈타 보호무역주의가 부활하는 조짐이다. 이는 세계 경기 회복과 경제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다자간 무역협상인 도하라운드 협상의 성공적인 타결이야말로 보호무역주의를 막고 세계 각국의 시장 접근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G20과 같은 국제기구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한국은 세계를 새롭고 개방적이며 다자간 교역이 활발한 미래로 이끌어야 한다. 한국이 리더십을 발휘해 보호무역주의의 대두를 방지할 수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바란다. "

▼G20 정상회의 아젠다에 '글로벌 금융 안전망 구축'이 들어 있는데.

"글로벌 경제위기는 쓰나미와 같다. 갑작스럽게 닥쳐 발생한다는 걸 안다고 해도 너무 늦어 회피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에 대처하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경제위기가 도래하는 걸 막기 위한 조기경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위기관리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의 권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

▼G20 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와 같은 사안도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기후변화와 같은 관심사를 배제하면 안 된다. 지난해 12월 코펜하겐 기후협약이 서명됐지만,거의 실패에 가깝다고 본다. 경제와 기후변화는 반대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은 녹색성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그 필요성과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게 좋을 듯하다. "

▼글로벌 금융규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이에 대해 선진국과 신흥국 간에 입장 차이가 상당한데.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신흥국이 IMF,IBRD와 같은 조직을 이끄는 대표자를 배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IMF 총재는 유럽인이,IBRD는 미국인이 맡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신흥국들이 글로벌 불균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한 만큼 이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더욱이 경제위기 이후 신흥국이 글로벌 경제질서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이 국제기구를 이끄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추가 위기를 방지하려면 세계 각국이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하영춘/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