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신영옥씨(50)는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인 루치아 역을 맡을 때마다 몸이 아프다. 특히 프리마돈나 홀로 무려 15분 동안 온전히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그분의 다정한 음성이 들린다'(일명 '광란의 아리아')를 부르고 나면 탈진 상태에 빠진다. 루치아 역으로 인해 처음으로 의사에게 상담받았고 공연 때마다 너무 몰입돼 심신이 힘들었다. 마침내 2006년 메트로폴리탄 공연 이후 다시는 이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19~25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광란의 아리아'를 다시 부른다. '광란의 아리아'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서 신씨에게 명성을 안겨줬고,'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1993년 그녀의 국내 오페라 데뷔 작품이기도 했던 만큼 깊은 인연을 떼기 어려웠다.

"작품 자체가 음악과 연기 모두 극한까지 몰아붙여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했죠.이번에 국립오페라단에서 이 작품을 다시 제의받았을 때 고민했지만 역시 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성악가로서 피할 수 없었어요. "

신씨의 상대역을 연기하는 테너 정호윤씨(33)도 요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연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의 목숨도 끊어야 하는 에드가르도 역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로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전속 가수였던 그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을 접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이 작품의 애호가였다. 하지만 세계 유수의 무대에 섰던 그로서도 이 작품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7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공연이 예정돼 있었지만 공연장 화재로 취소됐다.

정씨는 "제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한 역인 '리골레토'의 두카는 연기를 해도 감정이입이 어려웠던 게 사실이지만 이 역은 일상에서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몰입된다"고 설명했다.

신씨와 정씨는 이번 공연에서 처음 만났다. 정씨는 '숙원사업'으로 여기는 이 작품에서 성악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우러러 보던 신영옥씨와 공연하게 돼 너무 좋다고 했다. 특히 신씨가 세계적인 '디바'임에도 연습 때 출연진과 스태프진을 편하게 이끌어주는 것이 인상 깊었다는 것이다. 신씨는 "정호윤씨의 소문을 예전부터 들었다"며 "실제로 만나보니 역시 실력이 뛰어났다"고 치켜세웠다.

이번 공연은 작품 배경이 원작과 다르다. 미국,유럽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탈리아 연출가 마리오 코다리가 17세기 스코틀랜드로 설정된 작품 배경을 1차 대전 후 영국으로 바꿨다. 작품 스타일도 전통 형식에서 벗어나 무대가 회전하고 영화적인 기법을 도입한다. 신씨가 지금까지 이 작품으로 메트로폴리탄에서만 10여차례 무대에 섰지만 이렇게 원작을 재해석한 공연은 처음이다. 그는 "이번 오페라를 위해 새로 무대와 의상을 만드는 등 색다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제티가 작곡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집안의 강요로 연인(에드가르도)과 헤어진 루치아가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고,결국 에드가리도도 루치아의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져 그의 뒤를 잇는다는 내용의 비극이다.

글=김주완/ 사진=양윤모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