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파리 오페라 발레는 발레리나의 나이 마흔이 되면 강제로 퇴단(退團)시킨다.

무용수로서는 환갑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 플라텔,이자벨 게랭같은 대스타도 예외가 아니었다. 퇴단 후 어쩌다 객원 출연 기회를 주는 정도가 최고의 예우다.

그렇다면 이미 수년 전에 불혹을 넘어선 강수진이 아직도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스타로 여전히 사랑 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더 발레'(4월9~11일 · 예술의전당)는 그 이유를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번 공연은 갈라로 꾸며졌다. 갈라는 여러 작품에서 발췌했거나 짧은 소품들을 여럿 배치하는 방식이라 무용수 중심의 볼거리가 많은 대신 특별한 테마를 구성하기 힘든 편이다. 그런데도 '더 발레'는 뛰어난 기획으로 이전의 갈라에서 볼 수 없었던 재미를 제공했다.

첫째 강수진을 제대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냥 간판으로 세운 것이 아니었다. 강수진은 전체 9개의 프로그램 중 무려 네 작품에 출연해 무지개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뿜어냈다. 강수진은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같은 고전 발레보다 극적인 진실이 강조된 20세기 드라마 발레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발레리나다.

이날 마지막에 배치된 '카멜리아 레이디'가 그런 예다. 앞뒤를 잘라내고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의 슬프고도 격정적인 재회를 그린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우아한 포즈를 유지하느라 애쓰는 대신 이처럼 주인공의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말로 강수진의 진정한 실력이다.

그런데 그 이상이었다. '라흐마니노프 모음곡 제2번'에서의 모던한 감각,시종 공중에서 떠다닌 '베이퍼 플레인즈'에서의 놀라운 체력과 균형감,'구름'에서 드뷔시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섬세한 음악성에 이르기까지 강수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를 넘어섰다.

둘째는 강수진이 초대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전 · 현직 세 발레리노의 대단한 기량과 예술성이다.

이번 공연을 '강수진과 정말 괜찮은 남자들'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강수진의 주역 데뷔 파트너였던 이탈리아의 이반 카발레리(서호주 발레단 예술감독)는 킬리안의 '구름'에서 음악적 흐름을 읽어내면서 파트너와 정확한 호흡을 맞추는 노련함을 보여줬다.

캐나다의 제이슨 레일리는 놀라운 파워와 정교한 테크닉을 겸비한 무용수였다. '베이퍼 플레인즈'는 시종 강수진을 든 상태로 연속적인 동작을 이어갔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슈투트가르트뿐 아니라 유럽 발레계를 술렁이게 만들고 있는 네덜란드의 신예 마레인 라데마케르는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남성적인 아름다움과 우아한 움직임,빼어난 표정 연기를 펼쳐 보였다.

셋째 세계 발레계의 흐름을 잘 반영한 레퍼토리 구성이다. 전형적인 고전 발레 레퍼토리를 빼고 1970년대 이후부터 아주 최근에 안무된 작품 중에서 선정했다.

또 지나치게 현대 유럽의 느낌을 담아 난해한 작품은 배제하고 국내 관객들도 어렵지않게 이해할 만한 가작을 골라내어 모든 프로그램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냈다.

넷째 '라흐마니노프 모음곡 제2번'과 '카멜리아 레이디' 일부는 현장에서 연주되는 피아노 실연으로 처리함으로써 녹음 음악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다만 앙상블 디토의 유망 피아니스트 지용은 '카멜리아 레이디'의 이인무에 사용된 쇼팽의 발라드 제1번에서 춤의 뉘앙스와는 다르게 리듬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어 당황스러웠다.

이번 공연에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적자인 이반 카발레리가 이끄는 서호주 발레단 단원들이 참가해 공연의 다양성을 크게 높였다. 그러나 춤 솜씨만큼은 현재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의 젊은 단원들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발레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한국의 젊은 무용수들이 이들만큼 다양한 레퍼토리를 접하지 못하는 것은 큰 약점이다. 이날의 뛰어난 공연에,특히 레퍼토리에 큰 만족을 느끼면서 우리 무용수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자주 제공되기를,또 관객들이 새로운 추세에 박수를 보내기를 소망한다.

유형종 < 무지크바움 대표 ·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