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6년차 L대리는 지난 2월 어느 날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사장과 마주쳤다. 굳은 자세로 "안녕하십니까,사장님"이라고 인사하자 사장은 "어느 부서에 있나요"라며 말을 건네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장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L대리는 신세대답게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잠깐의 대화 뒤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하자 사장은 "시간될 때 사장실로 한번 놀러오세요"라고 말했다. L대리는 "예" 하고 씩씩하게 답했다.

◆사장과 직접 通하는 삼성SDI

며칠 후.L대리는 사장 메신저가 켜진 것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놀러오라고 하셨는데 진짜 가도 되나요?"라고 다시 물었다. 곧 "사장이 장난하는 줄 알았나요. 올라오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L대리는 동료들에게 "사장님 방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사람 없냐"고 의사를 물었다. 고참 부장과 차장들은 '저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이 장면을 지켜봤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달랐다. 몇 명의 젊은 직원이 손을 들었고 이들은 기세 좋게(?) 사장실로 향했다.

이들이 사장실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나중에 다시 한번 상사들을 놀라게 했다. 가까운 사이라도 언급을 꺼리는 인사 관련 사안을 사장에게 건의한 것.한 사람이 "K차장은 일도 잘하고 성과도 좋아 승진할 자격이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하자 다른 동료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듣고 있던 사장은 "그 정도라면 한번 검토해 보겠네"라고 답했다.

얼마 후 회사 인트라넷에는 승진자 명단이 올라왔고 L대리와 동료들은 자신들이 추천했던 K차장이 부장으로 승진한 것을 발견했다. 회사가 뭔가 크게 변하고 있다는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외국 회사 얘기가 아니다. 삼성SDI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다. 관료적이고 딱딱한 조직문화를 갖고 있는 삼성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많은 직원들이 당황해 했다는 후문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장은 지난해 말 삼성전자에서 옮겨온 최치훈 사장이다.

최 사장은 취임 직후 "사장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하라.어려우면 이메일을 보내라.24시간 내에 답변하겠다"고 직원들에게 방침을 밝혔다. 지금도 이 말을 실천하고 있다.

최 사장의 머릿속에는 '소통=효율과 성과'라는 공식이 자리잡고 있다. SDI 한 직원은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최고경영자(CEO)의 실천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놀고 있는 공간은 직원들에게 돌려줘라"

최치훈 사장 취임 후 삼성SDI의 변화는 곳곳에서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다. 최 사장은 우선 지방 사업장에 있는 유휴 공간을 카페,간이 도서관,게임존 등 직원들의 재충전 공간으로 개조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다. 출퇴근 시간을 직원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율출근제와 특정 시간 업무에 집중하는 집중근무제를 도입했다. '일하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효율이 중요하다'는 취지에서다. 최 사장은 최근 CEO 메시지를 통해 "일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하고,없으면 당당하게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최 사장은 비효율의 상징인 회의 및 보고서 문화 개선을 위한 원칙도 제시했다. 회의는 △꼭 필요한 사람만 참석하고 △명확한 의제를 가지고 △반드시 결론을 내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도 윗선에 보고할 책임이 있는 상급자가 작성에 직접 참여하고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두 번,세 번 반복해서 쓰는 과정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삼성SDI,삼성그룹 신사업 개척의 첨병

최 사장은 GE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최근 변화는 이런 최 사장의 외국 회사 경력과도 관련 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최 사장이 이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좋은 회사'를 내걸었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면 업무 성과가 높아져 그 결과가 고객,주주,협력파트너에게 돌아가는 '굿 컴퍼니'를 말하는 것이다.

삼성SDI의 역사를 보면 이런 변신은 필연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삼성SDI의 옛 이름은 삼성전관이다. 1970년 설립돼 세계 최대 브라운관 회사로 성장한 삼성SDI는 2000년대 초 신사업인 PDP와 OLED 사업에 진출했다.

또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는 2차전지 사업은 세계 1위를 넘보는 수준으로 올라섰고 지금은 자동차용 전지 사업으로 확대,발전시키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삼성SDI는 최고의 에너지업체로 변신을 꿈꾸고 있다. 말 그대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자신을 변신시켜온 게 삼성SDI의 역사다. 삼성 주변에서는 "삼성의 미래를 보려면 삼성SDI를 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신사업 개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효율과 창의가 넘치는 기업문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지도 모른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