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약탈문화재 박물관'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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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문화재 자발적 반환 기대난
국제공조 강화해 약탈과정 알려야
국제공조 강화해 약탈과정 알려야
흥선대원군(1820~1898년)은 난초를 잘 그렸다. 20년 전쯤 나는 그의 난초를 일본 모리오카에 있는 '하라케이기념관(原敬紀念館)'에서 처음 구경했다. 지난주 이집트에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는 소식에 당장 생각난 것이 그 '석파란(石坡蘭)'이었다. 대원군의 호를 따서 그가 그린 난초를 '석파란'이라 부르는데,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하라 케이(1856~1921년)가 대원군에게서 직접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경우는 약탈 문화재는 아니다. 신문기자 출신 외교관이던 그는 중국,프랑스를 거쳐 1896년 6월에는 전권공사로 서울에 왔다. 아마 이때 실각한 대원군에게서 난초를 선물 받은 모양이다. 일본 근대민주화 과정의 대표이고,'평민 수상'으로 추앙받던 하라 케이는 1921년 11월 도쿄역에서 18살짜리 철도원의 칼부림에 즉사했다.
'약탈' 문화재라면 먼저 떠오르는 작품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강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 이번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와 일본 궁내청의 조선왕실 의궤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런 명백한 약탈 문화재 이외에도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외국에 나가 있다.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18개국에 10만점 이상이라고 한다. 일본에 6만1409점,미국에 2만7726점,그리고 중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2000점 이상씩이라는 국립문화재연구소 통계가 있다.
하라케이기념관에 있는 석파란은 이 조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조사에 빠진 우리 문화재도 수두룩하다. 두 가지만 예를 들자.하나는 스웨덴의 어느 표본조사실에 남아 있을 우리 동식물과 광물 표본이다. 1935년 당시 한 국내 신문에는 스웨덴의 동물학자에게 동물 표본 수백점을 기증했다는 기사가 났다. 개국 이후 해방 때까지 수많은 외국 학자들이 조선을 찾아와 동물,식물,광물을 채집해 갔다. 베리히만(1895~1975년)은 그런 동물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이 수집한 표본이 세계 어딘가에 남아있을 듯하다.
또 한 경우는 20여년 전쯤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에서 본 해시계가 있다. 동아시아 시계전시에는 중국과 일본 것만 많았지,조선의 것은 한 점도 없었다. 중국과 일본이 그렇게 많은 해시계를 만든 동안 조선 사람들은 해시계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영국 과학박물관이 일제 시기에 조선의 해시계도 '일본' 것으로 수집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됐을 것이다. 이 경우는 간단한 조사로 우리 것은 구별해 낼 수가 있다. 해시계는 위도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재어 시간을 측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서울의 해시계와 일본(도쿄나 교토)의 해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문화재가 10만점이 아니라 그보다 월등히 많을 듯하다. 조사는 계속하면서 약탈품 반환을 위한 국제적 공조도 강화해야겠다. 이집트 그리스와 한국 중국 등 16개 국가 대표들이 모였다는 이번 회의를 약탈국인 일본 · 영국 · 프랑스 · 독일은 외면했고,앞으로도 그들의 냉담은 계속될 것이다. 작년 말 프랑스 법원은 한국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기각 판결했다.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해 빼앗아 간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강도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문화재 반환 운동은 약탈당한 나라들이 '약탈문화재 박물관'을 만들어 그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좋겠다. 그렇게 약탈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주면,머지않아 약탈국 국민 스스로 자신의 '강도 심보'에 눈떠 반환 운동이 일어날 것이 아닌가. 정치에 맡겨서는 약탈문화재 문제는 결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 뻔하기에 하는 제안이다.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하라 케이(1856~1921년)가 대원군에게서 직접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경우는 약탈 문화재는 아니다. 신문기자 출신 외교관이던 그는 중국,프랑스를 거쳐 1896년 6월에는 전권공사로 서울에 왔다. 아마 이때 실각한 대원군에게서 난초를 선물 받은 모양이다. 일본 근대민주화 과정의 대표이고,'평민 수상'으로 추앙받던 하라 케이는 1921년 11월 도쿄역에서 18살짜리 철도원의 칼부림에 즉사했다.
'약탈' 문화재라면 먼저 떠오르는 작품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강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 이번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와 일본 궁내청의 조선왕실 의궤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런 명백한 약탈 문화재 이외에도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외국에 나가 있다.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18개국에 10만점 이상이라고 한다. 일본에 6만1409점,미국에 2만7726점,그리고 중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2000점 이상씩이라는 국립문화재연구소 통계가 있다.
하라케이기념관에 있는 석파란은 이 조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조사에 빠진 우리 문화재도 수두룩하다. 두 가지만 예를 들자.하나는 스웨덴의 어느 표본조사실에 남아 있을 우리 동식물과 광물 표본이다. 1935년 당시 한 국내 신문에는 스웨덴의 동물학자에게 동물 표본 수백점을 기증했다는 기사가 났다. 개국 이후 해방 때까지 수많은 외국 학자들이 조선을 찾아와 동물,식물,광물을 채집해 갔다. 베리히만(1895~1975년)은 그런 동물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이 수집한 표본이 세계 어딘가에 남아있을 듯하다.
또 한 경우는 20여년 전쯤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에서 본 해시계가 있다. 동아시아 시계전시에는 중국과 일본 것만 많았지,조선의 것은 한 점도 없었다. 중국과 일본이 그렇게 많은 해시계를 만든 동안 조선 사람들은 해시계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영국 과학박물관이 일제 시기에 조선의 해시계도 '일본' 것으로 수집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됐을 것이다. 이 경우는 간단한 조사로 우리 것은 구별해 낼 수가 있다. 해시계는 위도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재어 시간을 측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서울의 해시계와 일본(도쿄나 교토)의 해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문화재가 10만점이 아니라 그보다 월등히 많을 듯하다. 조사는 계속하면서 약탈품 반환을 위한 국제적 공조도 강화해야겠다. 이집트 그리스와 한국 중국 등 16개 국가 대표들이 모였다는 이번 회의를 약탈국인 일본 · 영국 · 프랑스 · 독일은 외면했고,앞으로도 그들의 냉담은 계속될 것이다. 작년 말 프랑스 법원은 한국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기각 판결했다.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해 빼앗아 간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강도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문화재 반환 운동은 약탈당한 나라들이 '약탈문화재 박물관'을 만들어 그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좋겠다. 그렇게 약탈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주면,머지않아 약탈국 국민 스스로 자신의 '강도 심보'에 눈떠 반환 운동이 일어날 것이 아닌가. 정치에 맡겨서는 약탈문화재 문제는 결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 뻔하기에 하는 제안이다.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