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권희석 하나투어사장, 21년전 日하와이 수학여행 보고 "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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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때 감원 안한 의리가 국가대표 여행사로
"오케이,알았고… 적절히 판단해서 전권을 갖고 대응 바람."
권희석 하나투어 사장(53)은 사내 메신저인 '하나통' 라인으로 들어온 담당자 보고 사항에 대해 이런 답문을 자주 보낸다. 하나투어에서는 여행객의 해외 일정을 책임지는 랜드사 선정 같은 큰 일도 담당자 전결사항이다. 무슨 일이든 실무자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며,그렇기 때문에 전결범위 내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게 원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머슴이 아닌 주인 역할'을 강조하는 권 사장의 경영철학이 배어 있다.
◆스스로 주인되는 '자기주도형 리더'
권 사장은 어릴 적부터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을 죽도록 싫어했다. 학교 숙제도 딱 내준 만큼만 했고,그 이상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남이 시킨 일은 어거지로 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스스로 판단해서 추진한 일에 대해서는 회사의 틀을 움직이는 이슈를 제기하기도 했지요. "
그런 경험에서인지 권 사장은 회의에서까지 자신의 말을 지시로 듣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자신은 그냥 생각이 스쳐,브레인 스토밍 차원에서 의견을 물으려고 꺼낸 이야기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사장의 지시라며 그대로만 수행한다면 일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사장과 동등한 회사의 주인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내고,또 협의해 지혜를 모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렇게 해왔다. 첫 직장인 모나리자의 자재관리부에서 근무할 때,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문에서 원가절감 효과를 이뤄냈다.
◆진솔한 설득의 달인
두 번째 회사인 패션업체 하이센코리아에서도 휴일을 반납하고 일에 몰두했다. 같은 연배의 친구들보다 월급도 많이 받았다. "면접을 보러 가는데 경제신문에 도시근로자 가구 월평균 소득이 58만원이라고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급여 얘기가 나왔을 때 58만원은 받아야겠다고 했어요. 이전 회사에서는 38만원을 받았으니까 많이 부른 거지요. 그런데 오케이 하더군요. 첫 월급 명세표를 보니 기본급 38만원에 (경리 관련) 위험수당 20만원이 붙어 있더라고요. "
그의 일은 회사 자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규모 제조업체들은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다. 사채시장에서 돈을 돌려 급한 불을 끄는 형편이었다. 은행권 대출은 담보가 없어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용보증기금제도 규정을 들어 대출을 요구해도 은행은 담보를 가져오라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생각 끝에 서울 반포동에 있던 은행 지점장 집으로 쳐들어갔다. 아두를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로 조조 진영에 뛰어든 조자룡의 심정이었다. 들고 간 양주를 밤새 비우며 회사의 비전을 설명한 뒤 도와 달라고 설득했고,다음날로 대출은 성사됐다. 과장 6개월 만에 차장,1년 뒤 부장,다시 1년 뒤 이사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사업 확장을 위해 어렵사리 끌어들인 투자자가 회사 인력을 물갈이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임을 묻는다는 뜻에서 낸 사표는 반려되지 않았다.
세 번째 직장은 서울마케팅코리아.나산,조이너스,신원베스띠벨리 등 의류브랜드 광고를 대행하는 꽤 잘나가는 업체였다. 1989년 한 신문 창간기념 광고주 초청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떠난 하와이 여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말 놀랐어요. 호놀룰루공항에 교복 입은 일본 학생들이 바글바글 했어요.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100~200달러씩 돈을 챙겨주었고 이 돈으로 선물을 한보따리 사들고 와야 했죠.신혼여행도 속리산으로 갔던 시절이니 말하면 뭣해요. "
여행사를 만들면 10년 안에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본과의 격차가 10년 정도라고 생각했다. 광고대행사에 있는 만큼 심야시간대의 TV 띠광고를 싸게 사서 광고를 내보내 여행객을 모으는 방식을 구상했다. 1995년 서울마케팅코리아 사장과 코오롱여행사 차장 출신 3명이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여행사를 차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코오롱여행사 출신이 발을 빼면서 여행사 설립 계획은 무산됐다.
◆사람이 전부다
그래도 여행업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당시 국일여행사에서 독립한 중학교 동창 박상환씨(현 하나투어 회장)와 1996년 의기투합,홀세일러를 표방한 하나투어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월급은 반으로 줄었지만,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에 주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덮쳐온 외환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자고 일어나면 몇몇 회사가 쓰러지던 시기였다. 여행수요는 전년도의 10%도 되지 않았다. 1997년 12월의 자금사정은 한 달도 못 버틸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 내야 했다. 한 가지 원칙은 고수했다. 160명의 인력에 대한 구조조정은 절대 없다는 것이었다.
"인원을 3분의 1로 나눠 △석 달에 한 달씩 근무하거나 △열흘 단위로 일하거나 △전 직원이 근무하며 번 만큼만 지출하거나,이 세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했어요. 모두들 아침에 출근할 데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번 만큼만 먹고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어요. 일단 1인당 30만원만 받고 수익이 나는 만큼 공평하게 나눠 갖기로 한 거죠."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역 분야에서 출장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쳐다보지도 않던 출장용 비행기 티켓시장이었다. 한 명도 내보내지 않은 하나투어만이 폭증하는 티켓 발권에 대응할 수 있었다. 항공사 마케팅 담당자들이 사무실로 몰려와 일을 거들기까지 했다. 이후 12년 연속 1등 기업으로 여행업계를 이끌게 됐다. 위기가 곧 기회였으며,사람에 대한 애정이 그 기회를 살리는 불씨였다.
◆'우공이산'의 끈기로 코스닥 상장
권 사장은 2000년 또 한번 큰일을 해냈다. 하나투어를 여행업계 처음으로 코스닥에 상장시킨 것이다. "여행사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좋지 않았어요. 여행사 다니는 총각에게는 딸을 주지 않겠다는 부모들이 많았죠.업계에서조차 여행사가 무슨 상장이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상장한다고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주간사 선정에도 애를 먹었어요. 누가 상대를 해줘야 말이죠.마침 현대증권에 다니는 선배를 설득해 진전이 있는 듯했는데,선배가 지점으로 발령 나는 바람에 도루묵이 돼버렸어요. "
그래서 조금 알고 지낸 임원이 있던 대신증권 문을 두드렸다. 역시 반응은 냉랭했다. 대신증권의 기업상장 담당 직원들을 지하 1층 식당에 불러 모아 놓고 미래산업으로서 여행업을 키워야 한다며 조근조근 얘기했다.
하나투어의 상장은 여행업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꿔놨다. 2006년에는 코스닥 기업 최초로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하나투어의 브랜드가치를 끌어올렸다.
◆투명경영 원칙주의자
하나투어가 여행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투명경영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나투어에는 여행경비로 매달 1000억원 이상의 현금이 돌아간다. 이 돈을 잠깐 다른 데 굴려 수익을 내자는 유혹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재무통인 권 사장은 회사에 실제로 떨어지는 수익 이외의 돈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 현금흐름과 이익흐름은 따로 가져가는 게 원칙이다. 금융위기로 주식,펀드가 곤두박질칠 때 권 사장의 경영원칙은 더욱 돋보였다. 원칙을 벗어난 모험을 하기보다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 뒤 기다리는 자세는 북산(北山)의 우직한 우공(愚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권 사장은 하나투어를 세계를 무대로 삼는 글로벌 여행종합그룹으로 성장시킨다는 계획도 차근차근 실천하고 있다. 한국인 여행객 서비스에 국한됐던 해외 현지 지사 등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인에게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우리나라 5000만 시장은 너무 작습니다. 일본의 1억3000만,중국의 13억 시장으로 활동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나아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여행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여행그룹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하나투어의 1400명 '주인'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권희석 하나투어 사장(53)은 사내 메신저인 '하나통' 라인으로 들어온 담당자 보고 사항에 대해 이런 답문을 자주 보낸다. 하나투어에서는 여행객의 해외 일정을 책임지는 랜드사 선정 같은 큰 일도 담당자 전결사항이다. 무슨 일이든 실무자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며,그렇기 때문에 전결범위 내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게 원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머슴이 아닌 주인 역할'을 강조하는 권 사장의 경영철학이 배어 있다.
◆스스로 주인되는 '자기주도형 리더'
권 사장은 어릴 적부터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을 죽도록 싫어했다. 학교 숙제도 딱 내준 만큼만 했고,그 이상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남이 시킨 일은 어거지로 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스스로 판단해서 추진한 일에 대해서는 회사의 틀을 움직이는 이슈를 제기하기도 했지요. "
그런 경험에서인지 권 사장은 회의에서까지 자신의 말을 지시로 듣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자신은 그냥 생각이 스쳐,브레인 스토밍 차원에서 의견을 물으려고 꺼낸 이야기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사장의 지시라며 그대로만 수행한다면 일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사장과 동등한 회사의 주인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내고,또 협의해 지혜를 모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렇게 해왔다. 첫 직장인 모나리자의 자재관리부에서 근무할 때,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문에서 원가절감 효과를 이뤄냈다.
◆진솔한 설득의 달인
두 번째 회사인 패션업체 하이센코리아에서도 휴일을 반납하고 일에 몰두했다. 같은 연배의 친구들보다 월급도 많이 받았다. "면접을 보러 가는데 경제신문에 도시근로자 가구 월평균 소득이 58만원이라고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급여 얘기가 나왔을 때 58만원은 받아야겠다고 했어요. 이전 회사에서는 38만원을 받았으니까 많이 부른 거지요. 그런데 오케이 하더군요. 첫 월급 명세표를 보니 기본급 38만원에 (경리 관련) 위험수당 20만원이 붙어 있더라고요. "
그의 일은 회사 자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규모 제조업체들은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다. 사채시장에서 돈을 돌려 급한 불을 끄는 형편이었다. 은행권 대출은 담보가 없어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용보증기금제도 규정을 들어 대출을 요구해도 은행은 담보를 가져오라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생각 끝에 서울 반포동에 있던 은행 지점장 집으로 쳐들어갔다. 아두를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로 조조 진영에 뛰어든 조자룡의 심정이었다. 들고 간 양주를 밤새 비우며 회사의 비전을 설명한 뒤 도와 달라고 설득했고,다음날로 대출은 성사됐다. 과장 6개월 만에 차장,1년 뒤 부장,다시 1년 뒤 이사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사업 확장을 위해 어렵사리 끌어들인 투자자가 회사 인력을 물갈이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임을 묻는다는 뜻에서 낸 사표는 반려되지 않았다.
세 번째 직장은 서울마케팅코리아.나산,조이너스,신원베스띠벨리 등 의류브랜드 광고를 대행하는 꽤 잘나가는 업체였다. 1989년 한 신문 창간기념 광고주 초청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떠난 하와이 여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말 놀랐어요. 호놀룰루공항에 교복 입은 일본 학생들이 바글바글 했어요.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100~200달러씩 돈을 챙겨주었고 이 돈으로 선물을 한보따리 사들고 와야 했죠.신혼여행도 속리산으로 갔던 시절이니 말하면 뭣해요. "
여행사를 만들면 10년 안에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본과의 격차가 10년 정도라고 생각했다. 광고대행사에 있는 만큼 심야시간대의 TV 띠광고를 싸게 사서 광고를 내보내 여행객을 모으는 방식을 구상했다. 1995년 서울마케팅코리아 사장과 코오롱여행사 차장 출신 3명이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여행사를 차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코오롱여행사 출신이 발을 빼면서 여행사 설립 계획은 무산됐다.
◆사람이 전부다
그래도 여행업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당시 국일여행사에서 독립한 중학교 동창 박상환씨(현 하나투어 회장)와 1996년 의기투합,홀세일러를 표방한 하나투어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월급은 반으로 줄었지만,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에 주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덮쳐온 외환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자고 일어나면 몇몇 회사가 쓰러지던 시기였다. 여행수요는 전년도의 10%도 되지 않았다. 1997년 12월의 자금사정은 한 달도 못 버틸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 내야 했다. 한 가지 원칙은 고수했다. 160명의 인력에 대한 구조조정은 절대 없다는 것이었다.
"인원을 3분의 1로 나눠 △석 달에 한 달씩 근무하거나 △열흘 단위로 일하거나 △전 직원이 근무하며 번 만큼만 지출하거나,이 세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했어요. 모두들 아침에 출근할 데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번 만큼만 먹고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어요. 일단 1인당 30만원만 받고 수익이 나는 만큼 공평하게 나눠 갖기로 한 거죠."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역 분야에서 출장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쳐다보지도 않던 출장용 비행기 티켓시장이었다. 한 명도 내보내지 않은 하나투어만이 폭증하는 티켓 발권에 대응할 수 있었다. 항공사 마케팅 담당자들이 사무실로 몰려와 일을 거들기까지 했다. 이후 12년 연속 1등 기업으로 여행업계를 이끌게 됐다. 위기가 곧 기회였으며,사람에 대한 애정이 그 기회를 살리는 불씨였다.
◆'우공이산'의 끈기로 코스닥 상장
권 사장은 2000년 또 한번 큰일을 해냈다. 하나투어를 여행업계 처음으로 코스닥에 상장시킨 것이다. "여행사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좋지 않았어요. 여행사 다니는 총각에게는 딸을 주지 않겠다는 부모들이 많았죠.업계에서조차 여행사가 무슨 상장이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상장한다고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주간사 선정에도 애를 먹었어요. 누가 상대를 해줘야 말이죠.마침 현대증권에 다니는 선배를 설득해 진전이 있는 듯했는데,선배가 지점으로 발령 나는 바람에 도루묵이 돼버렸어요. "
그래서 조금 알고 지낸 임원이 있던 대신증권 문을 두드렸다. 역시 반응은 냉랭했다. 대신증권의 기업상장 담당 직원들을 지하 1층 식당에 불러 모아 놓고 미래산업으로서 여행업을 키워야 한다며 조근조근 얘기했다.
하나투어의 상장은 여행업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꿔놨다. 2006년에는 코스닥 기업 최초로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하나투어의 브랜드가치를 끌어올렸다.
◆투명경영 원칙주의자
하나투어가 여행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투명경영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나투어에는 여행경비로 매달 1000억원 이상의 현금이 돌아간다. 이 돈을 잠깐 다른 데 굴려 수익을 내자는 유혹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재무통인 권 사장은 회사에 실제로 떨어지는 수익 이외의 돈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 현금흐름과 이익흐름은 따로 가져가는 게 원칙이다. 금융위기로 주식,펀드가 곤두박질칠 때 권 사장의 경영원칙은 더욱 돋보였다. 원칙을 벗어난 모험을 하기보다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 뒤 기다리는 자세는 북산(北山)의 우직한 우공(愚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권 사장은 하나투어를 세계를 무대로 삼는 글로벌 여행종합그룹으로 성장시킨다는 계획도 차근차근 실천하고 있다. 한국인 여행객 서비스에 국한됐던 해외 현지 지사 등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인에게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우리나라 5000만 시장은 너무 작습니다. 일본의 1억3000만,중국의 13억 시장으로 활동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나아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여행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여행그룹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하나투어의 1400명 '주인'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