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기 회복세가 뚜렷해지면서 월가에서 인플레이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통화당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중에 풀린 돈이 조만간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다른 편에서는 생산갭(실질 생산 능력과 실제 경제활동의 차이)으로 상당 기간 물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맞서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5일 발표한 월가의 경제 전문가 56명 대상 경제전망 조사 결과에서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각이 팽팽하게 갈렸다. 내년까지 미국 경제가 직면한 위험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23명은 '가속화되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꼽았다. 이에 반해 또 다른 23명은 '지나치게 낮은 물가수준'이 미국 경제 회복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골드만삭스의 얀 하지우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내놓은 경제 분석 보고서에서 "재정과 통화의 확장정책으로 인해 상당수 시장참여자들이 인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지만 이는 막대한 생산갭을 간과한 탓"이라며 "생산갭을 줄이는 데 수년이 걸리는 만큼 핵심 물가는 당분간 안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물가지수 안정은 거주 비용 하락에 따른 착시 효과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32%를 차지하는 주택 비용을 제외하면 전년 같은 달에 비해 2.3% 상승한 소비자물가지수가 실제로는 3%를 넘는다는 것이다. 얼라이언스 번스타인의 조지프 카슨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면 결국 CPI는 올라가게 된다"고 강조했다.

통화당국 안에서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각이 극명하게 갈린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전날 상하원 합동 경제위원회에 나와 "원유 등 일부 국제 상품가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안정돼 있다"며 상당 기간 제로 수준의 기준 금리를 유지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FRB는 개인소비지출(PCE) 지수가 특히 부진하다는 점을 들어 지나치게 낮은 물가수준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PCE 지수는 연율로 0.5% 상승하는 데 그쳤다. 최근 재닛 옐런 샌프란시스코 연방은행 총재가 "실업률이 높은 가운데 소득 증가율도 더딘 탓에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고 진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경기가 회복되면서 매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캔자스시티 연방은행의 토머스 호니그 총재는 "인위적으로 낮은 금리를 상당 기간 묶어 놓으면 버블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의 처방은 기준 금리를 1% 수준까지 올리는 것이다.

논쟁은 치열하지만 월가에서는 FRB가 당장 기준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를린치의 이탄 해리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되면 통화당국은 금리를 올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며 "연내 금리를 올릴 것 같지 않다"고 전망했다.

인플레이션 우려와 함께 고용도 FRB 금리 정책의 변수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은 최근 민간 부문에서 고용이 살아나고 있지만 이번 경기 침체로 사라진 820만개의 일자리를 언제 채울지 예상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WSJ 조사에서도 월가 경제전문가들은 3월 9.7%인 미국 실업률이 연말에 9.3% 수준으로 떨어지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