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인터뷰] 선박 영업설계사 권오익씨 "수백억짜리 배 팔러 지구촌 누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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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가 OK 할때까지 '설계'
어떤 능력이 필요하죠
해박한 조선 공학 지식은 기본…선주 감동시킬 교양까지 갖춰야
요즘 조선업계 화두는…
탄소배출 감축 등 환경문제 이슈, 수주 비결은 '신뢰·품질·안전'
어떤 능력이 필요하죠
해박한 조선 공학 지식은 기본…선주 감동시킬 교양까지 갖춰야
요즘 조선업계 화두는…
탄소배출 감축 등 환경문제 이슈, 수주 비결은 '신뢰·품질·안전'
1997년 노르웨이 오슬로 시내 호텔의 스위트룸.권오익 당시 차장을 비롯한 대우조선해양의 영업설계팀원 5명은 초조하게 선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는 선주의 요청 사항을 듣고 밤을 꼬박 새며 도면을 만든 게 벌써 일주일째.서울에선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번 설계만 따낸다면…." 팀원들은 한쪽 벽면에 걸린 도면을 바라보며 그 옛날 '배수의 진'을 친 전장의 병사들을 마음속 깊이 떠올렸다.
이윽고 선주와 만난 자리.노르웨이 최대 해운회사인 빌헬름센(Wilhelmsen)의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벌겋게 충혈된 눈빛들에 이미 압도돼 있었다. 자동차 모형 6000대를 가로 4m,세로 1.5m 크기의 도면에 빼곡히 그려넣은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던 것."언제 이걸 다 했나?" 이 한마디와 함께 8000만달러짜리 특수 자동차 운반선 3척은 대우조선해양의 몫으로 돌아갔다.
선박 영업설계는 매우 독특한 직업이다. 조선 엔지니어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기본이고,세계 최고의 갑부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을 정도의 교양도 갖춰야 한다. 영업설계가 '조선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다.
30여년 전 일본 잡지에 난 도면을 확대 복사해 몇날 며칠을 베끼면서 설계 기술을 배웠던 이들이 지금은 한국을 세계 1위 조선 강국의 반열에 올려놨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를 가장 싫어한다는 영원한 '바다 사나이',40대에 철인 3종 경기를 거뜬히 해낼 만큼 강철 체력의 소유자….권오익 대우조선해양 영업설계팀 이사(51)를 서울 무교동 본사에서 만났다.
▼자부심이 대단하겠습니다.
"한국 조선 1~5위가 세계 1~5위입니다. 이런 산업은 조선밖에 없을 겁니다. 아주 복잡한 배까지 자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국가 역시 한국뿐이고요. 일본은 조선학과가 거의 사라져 설계능력이 없습니다.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최소 10년은 우리가 멀리 달아날 수 있을 겁니다. "
▼우리만의 장점이 있나요.
"유연성입니다. 조선산업은 철저히 주문에 의존합니다. 맞춤 양복과 똑같아요. 전 세계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 중에서 똑같은 배는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예요. 선주마다 요구하는 사양이 다르거든요. 선주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게 한국 조선의 장점입니다. 일본은 이미 이런 유연성을 오래 전에 상실했습니다. "
▼원래 조선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해군사관학교나 공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력이 안 좋았어요. 입학원서 때문에 고민하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써붙인 '조선입국'이란 말을 보고 '아 이거다'라고 생각했죠.그래서 조선공학과를 지망했고,지금도 이 선택엔 후회가 없습니다. "
▼어려운 점이 많았을텐데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죠.지금은 흔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컴퓨터 이용 설계(CAD)라는 게 없어서 모든 도면을 손으로 그렸습니다. 선박 치수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지우개에 물을 묻혀 먹물을 지우고 다시 그려야 했어요. 그때는 선주의 변심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참고할 도면도 없어서 해외 잡지에 나온 도면을 확대 복사해 '복원'하곤 했죠.오늘의 우리를 만든 경쟁력이자 전설 같은 얘기들이지요. "
▼영업도 쉽지 않죠?
"후배들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영업설계를 하려면 먼저 교양인이 되라고요. 밥 먹으며 하는 대화가 수백억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선주가 '갑'이므로 선박회사는 접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서로 당당히 얘기를 나눌 수 있어야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거든요. "
▼선박 영업설계를 하려면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할까요.
"조선소에 근무하는 누구나가 민간 외교 사절이 돼야 합니다. 한국의 문화를 잘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대화를 풀기에 좋습니다. 또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전히 몸에 익혀야 해요. 영업설계는 선주와 최일선에서 만나는 일이라 매너는 기본이고 역사,문화,예술,음식 등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조선공학 전반에 대한 지식입니다. 영어 등 외국어 실력도 반드시 갖춰야 하고요. 그래서 이쪽에서 일하려면 입사 후에도 부단히 책을 읽고 공부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
▼술도 많이 드실 것 같은데요.
"양으로 많이 마시는 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만 보드카 수십종을 모두 외울 정도로 자주 접하긴 합니다. 노르웨이,그리스 등 주요 선주들이 밀집해 있는 국가들의 전통술도 어지간한 것들은 마셔 봤으니까요. 요즘에는 와인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려고 합니다. 영어처럼 와인을 모르면 대화하기가 어렵거든요. "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일주일이 멀다할 만큼 해외 출장이 잦다 보니 체력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산행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결혼 전에 히말라야를 오르려고도 했는데 당시 결혼을 앞둔 아내가 히말라야와 자기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서 포기했을 정도로 산에 푹 빠졌죠.마라톤도 좋아합니다. 42.195㎞를 3시간15분대에 완주하니까 제 나이로선 꽤 괜찮은 편이죠.지금도 1년에 두 차례 정도 풀코스를 완주해요. 최종 목표는 사하라,고비,아타카마,남극에서 마라톤 완주를 해보는 겁니다. "
▼1년에 몇 건의 프로젝트를 맡습니까.
"연간 70척 정도를 계약합니다. 하나의 배를 계약할 때마다 최소 5개의 경쟁업체들이 달려들기 때문에 매번 치열한 경쟁입니다. 설계 기간은 표준선을 이용할 경우 짧게는 며칠 정도 걸리고,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몇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대우조선해양에서 나가는 제품은 군함과 일부 특수선을 제외하고는 제가 대부분 관여하고 있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선박은요.
"길이 380m,폭 68m짜리 유조선을 설계한 적이 있습니다. 여의도 광장만한 배였는데 시속 30㎞로 바다를 달릴 수 있는 놈이죠.해양오염 방지를 위해 이중선체구조를 가진 배였는데 지금까지도 사상 최대예요.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기름의 양이 자동차 1000만대에 넣을 수 있는 정도니까요. "
▼요즘 조선업계 화두는 뭡니까.
"환경문제와 안전입니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면서 탄소 배출 감축이 화두가 됐습니다. 대우조선해양도 연료 절감을 위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특허도 많이 냈습니다. 이 분야를 어떻게 개척하느냐에 따라 향후 조선산업의 키를 누가 쥘지 판가름날 겁니다. "
▼요즘 조선 경기가 어렵다는데요.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수주를 할 수 있는 비결은 고객에 대한 신뢰와 품질,그리고 안전입니다. 언제든 기회는 올 것이고,기본을 지키다보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대우조선해양의 모토인 'All for one,one for all'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
글=박동휘/사진=허문찬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