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8일 정석주 국제협력팀장을 비롯한 한국조선협회 관계자 7명이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런던에 있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본부를 찾아가 국제회계기준(IFRS)의 파생상품 회계처리 방식에 대한 한국 조선업계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IASB 측은 "한번 검토해보겠다"고 얘기했지만 '왜 정부 당국자도 아닌 업계 관계자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주장을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협회 관계자는 전했다.

◆업계 발등의 불…정부는 시큰둥

내년 IFRS 의무적용을 앞두고 국내 조선업계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수주금액을 달러화로 받는 조선사 입장에선 환위험 헤지용 파생상품 회계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첨예한 관심사다.

IFRS 방식에 따를 경우 원 · 달러 환율이 상승하면 수주금액의 가치 상승분을 차변(자산 증가)에 기입하고,파생상품(외화선물)에서 발생한 손실분은 대변(부채 증가)에 기재해야 한다. 이때 발생한 부채가 수주대금이 다 들어오면 자연 소멸되는 것임에도 불구,조선업체들의 부채 비율이 급등한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조선협회는 IFRS가 '경제의 실질'을 중시하는 회계처리 방식인 만큼 자산증가분과 부채증가분을 차감해 최종 증감분만 기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가령 환율 변동으로 자산이 20억원 늘고,부채가 30억원 증가할 경우 부채 순증분 10억원만 표시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산 20억원,부채 30억원을 따로 기입할 때에 비해 부채비율이 덜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연초 런던 방문 결과가 신통치 않자 조선협회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차례로 방문해 직접 나서줄 것을 건의했지만 "국제적으로 적용되는 IFRS에 대해 한국 조선산업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달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한국회계기준원 역시 "조선산업에 국한된 문제를 회계기준원이 나서 주장하는 것은 조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 측 견제에 고군분투

다급해진 조선협회는 지난달 다시 IASB를 방문하려 했으나 "4월 중 마크 트위디 위원장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니 그때 만나자"는 회신이 왔다. 결국 지난 15일 방한한 트위디 위원장 등 IASB 측과 조선협회 간 간담회가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트위디 위원장은 "건의내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다소 진전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 분야에서 한국과 경쟁관계인 일본 · 중국 측 인사 3명이 IASB 위원으로 있어 국내 조선업계 입장을 반영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일본 조선업계는 수주금액을 엔화로 받아 IFRS를 도입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중국도 위안화 환율 변동폭이 적어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제로 간담회에서 일본 출신 야마다 다츠미 IASB 위원은 한국조선협회 제안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협회 관계자는 전했다.

정도진 중앙대 교수(경영학)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파생상품 가치평가와 회계처리 문제가 중요 이슈로 떠오르자 각국 금융감독당국은 IASB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며 "한국은 일본 중국과 달리 IASB 위원이 없어 정부가 더욱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싱가포르는 작년 말 18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회계산업선진화위원회를 구성했다"며 "한국도 IFRS 관련 이슈에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위원회 구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