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아저씨는 정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 주더라.그런데도 돈은 많이 받더라."

모처럼 휴일을 맞아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있는 평범한 월급쟁이인 김 과장.이 모습을 참지 못한 아내가 툭 던진 한마디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라는 짜증이 확 튀어 나왔지만 꾹꾹 눌러 참기로 했다.

김 과장도 옆집 아저씨가 부럽기 짝이 없다. 돈을 많이 벌어온다지,칼퇴근에 주말은 어김없이 쉰다지,무슨 무슨 날이라고 기념품은 또 왜 그리 많이 받아 오는걸까. 그래봤자 어쩔수 없다. 옆집 아저씨가 다니는 직장은 이른바 '신이 내린 직장'인 것을.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열심히 일해서 내 직장을 신이 내린 직장으로 만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칼퇴근에 정년보장에…

김 과장의 옆집 아저씨는 정부산하기관인 공사에 다닌다. 자세한 생활을 모르지만 아내가 툭툭 던지는 말을 요약하면 옆집 아저씨 생활은 대충 이렇다. 입사는 12년차쯤.직급은 과장이지만 연봉은 7000만원이 넘는 것 같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가끔은 일찍 가기도 하지만 새벽밥을 먹고 출근하는 김 과장하고는 다르다.

아내가 무엇보다 부러워하는 것은 퇴근시간.일주일에 한두 번 빼고는 저녁밥을 거의 집에서 먹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공부도 도와준다.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자정이 넘어 술냄새를 풍기며 귀가하는 김 과장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다.

주말도 확연히 다르다. 옆집 아저씨는 웬만한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 놀이동산에도 가고,도서관에도 간다. 김 과장은 아이들과 놀이동산에 가본 기억이 아득하다. 토요일엔 상사와 함께 등산을 간다. 한번쯤은 빠지고 싶지만,상사가 등산마니아다보니 빠지는 게 눈치 보인다. 일요일엔 출근하는 날이 많다. 월요일 회의자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임원이 못 되는 선배들은 회사 정관에 정해진 정년에 관계없이 회사를 떠난다. 반면 옆집 아저씨가 다니는 직장은 웬만해선 정년 전에 쫓겨나지 않는다는 게 아내의 얘기다. '진작 공기업에나 들어갈 것을'이라고 후회해 보지만,이미 때는 늦었다.

◆남들이 자리 뺏을까 걱정

정부부처 산하 공기업에 다니는 박 모 과장(35 · 여)은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공기업 직원이지만 실제 소속은 공기업 산하 문화공연 담당 재단이다. 업무 특성상 본사를 떠나 공연장에서 따로 근무한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박 과장과 사원 1명 등 달랑 둘뿐이다.

윗 상사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자체가 천국이나 다름없다. 본사에서 지시한 기획을 공연장 관계자들과 상의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눈치 볼 것도 없이 그야말로 칼퇴근이다. 재단 소속이지만 공기업 직원들과 똑같은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

박 과장의 고민은 따로 있다.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지면서 박 과장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이 늘어난다는 것.4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 과장은 본사에 '박 과장을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식의 평판이 알려지도록 공연장 관계자들을 구스르는 등 적극적인 자리보전 로비에 집중하고 있다.

신이 내린 직장의 좋은 점은 개인 시간이 많은 것뿐만이 아니다. 공기업에 다니는 현 모 과장(36)은 "직속 임원들이 3년마다 교체되기 때문에 상사와 맞지 않아 '찍힌' 경우라도 참을 인 자 몇 번 그리면서 납작 엎드려 있다보면 자연히 해결된다"고 귀띔했다.

◆석사학위 3개 비결은 칼퇴근

흔히 신이 내린 직장으로 회자되는 공기업들도 예전 같지 않다. 경영효율화다,경영평가다 해서 이전에 비해선 근무조건이 악화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내린 직장은 아직도 곳곳에 숨어 있다. 국 · 공립대학 교직원도 그중 하나다.

미국 MBA(경영학 석사)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대기업의 김성진 대리(33)는 신촌의 한 어학원에서 만난 대학 교직원 이모씨(33)의 얘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석사 학위를 무려 3개나 따내고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씨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김 대리에게 이씨는 "할 일이 없다보니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일과가 끝나면 바로 옆동 강의실에서 대학원 과정을 들을 수 있는 데다,등록금도 학교가 지원해 준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었다.

각종 '협회' 등도 숨어 있는 신의 직장으로 꼽힌다. 과학기술 관련 협회에서 근무하는 박모씨(34)는 "전공과 관련된 곳에 응시해 합격했을 뿐인데 회사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고 설명했다. "오후 6시 이후엔 사무실에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칼퇴근이 확실한 것은 물론,대학원에서 석 ·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것.그는 "대학 후배들이 진로 상담을 할 때면 꼭 우리 회사에 원서를 넣어보라고 추천한다"고 말했다.

◆이직 어렵고 비전 찾기 힘든 것은 단점

신이 내린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비애는 있다. '호환 불가능성'이 그 중 하나다. 경쟁사도,관련 업계도 없는 직장에 다니다 보니 직장 생활 도중에 이직을 하고 싶어도 마땅치 않다.

국내 한 증권 유관 기관에 근무하는 이모 과장(40)은 올해로 10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근무여건이나 사내복지,임금 수준은 남부럽지 않다. 하지만 가끔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정년 보장은 옛말이다. 국정 감사 때마다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질타가 쏟아지면서 기관장이 바뀐다. 그때마다 혁신한다며 적잖은 물갈이가 단행된다. 철저한 성과평가를 강조하다보니 강등인사도 최근 부쩍 늘었다. 올해 초 정기 인사 때도 부서장으로 일하던 모 선배가 부원으로 강등당한 것을 본 이 과장이다.

문제는 새 직장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도 갈 데가 없다는 것.입사 이후 이 과장이 해 온 일은 민간기업에는 아예 필요없는 업무다. 이 과장은 "정년 퇴직한 선배 대부분은 딱히 할일 없이 치킨집이나 호프집을 차리는 걸 보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걱정이 벌써부터 앞선다"고 말했다.

◆'무늬만 신의 직장'

신의 직장도 아니면서 신의 직장으로 알려지는 바람에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의 한 구청에서 근무하는 주모씨(31)는 '공무원은 철밥통'이라는 말만 들으면 울화통이 치민다. 한가하고 편하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원인을 직접 만나는 주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참을 인(忍)'자를 가슴에 새긴다. 말도 안 되는 민원을 상습적으로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에게,약간이라도 기분나쁘게 대하면 "세금 받아먹고 살면서 국민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느냐"는 질타를 들어야 한다. 사기업 AS센터에 온 듯 당당하게 돈(복지비)을 내놓으라는 어르신들을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칼퇴근이 무조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각종 공문을 처리하고 보고서를 쓰다 보면 저녁을 거르기 일쑤다.

하지만 이런 고충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철밥통이 왜 이러시느냐"는 비아냥거림만 듣는다. 주씨는 "요즘 공무원은 전처럼 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해 못할 고충도 많다"고 털어놨다.

이상은/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이고운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