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후유증을 다룬 영화 '디어 헌터'에서 사이공의 불법 도박장에 남아 붉은색 머리띠를 매고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닉(크리스토퍼 월큰)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자욱한 담배연기와 소음,이상한 광기 속에서 죽마고우 마이클(로버트 드 니로)도 알아보지 못한 채 게임 도중 머리에 권총이 발사돼 죽는 장면은 한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베트콩에 잡혀 살인 게임의 도구가 됐던 끔찍한 경험이 닉에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아있었던 탓이다. 실제로 베트남에 파병됐던 미군의 상당수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자 미국 정신과협회는 1980년대 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공식 질병으로 규정했다. 9 · 11 테러 직후에도 미국인의 44%가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호소했고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집단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한다. 심한 불안이나 환각에 시달리는가 하면 희로애락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1995년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생존자들도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정신과 진찰을 받은 680여명 중 절반 이상이 수면장애와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트라우마의 원인은 전쟁이나 재해 사고 폭력 고문 등 여러가지다. 반복 기억,환각,극도의 긴장과 불안,불면,일상생활 기피 등의 증상을 나타내는 게 보통이다. 이 같은 증상은 짧게는 사건 후 일 주일,길게는 30년이 넘어서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니 얼마나 끈질긴지 짐작할 만하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30%는 중등도의 증상이 지속되거나 악화되고 40%도 가벼운 증상을 계속 느낀다는 게 의학적 통계다.

천안함 침몰로 사망 · 실종된 장병 가족들이 함미 인양 후 잇따라 탈진하거나 실신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대부분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식사도 못한 채 불면에 시달린다고 한다. 생존 장병이나 해군 동료들도 심한 공허감에 빠져 있을 게다. 이들이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트라우마'라는 책을 쓴 정신과 전문의 주디스 허먼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기억'과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더라도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해 현실로 받아들인 다음 스스로를 위해 슬퍼하는 시간을 갖는 게 도움이 된다는 조언이다. 정부나 사회의 지속적 관심과 보살핌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