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질 좀 안하고 살 수 없을까. " 1999년 교육부(현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육행정 사무관(5급) 2년차이면서 주부였던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46)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불쑥 이런 화두(話頭)에 빠졌다. 주부라면 누구라도 한번 쯤 해봤을 생각이었지만,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스팀청소기'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팀청소기 사업을 직접 해보기로 결심하고는 다니던 직장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고시합격 후 보장 받은 간부 공무원직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에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친정과 시댁을 통틀어 사업을 해본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 신분을 내던진 것은 적잖은 모험이었다. 교육공무원으로서 기획한 안들이 정책에 즉각 반영되는 것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던 때이기도 했다. 한 대표는 "스팀청소기는 내가 만들어야 가장 잘 만들 수 있고,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창업 당시를 회상했다.

◆"현실에 안주하는 습성을 버려라."

평생 교직에 몸 담은 부친의 2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한 대표는 학창시절 공부를 곧잘 하고 가끔 고집을 피울 땐 아무도 못말렸지만,커서 사업가가 될 것으로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1986년 이화여대 불문학과 졸업반 때 대학동기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스위스에 본사를 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입사했다. 하지만 IOC 근무는 2년을 채우고 그만뒀다. 첫 직장으로 IOC를 택했던 두가지 이유였던 완벽한 영어 구사와 함께 스스로 유학자금을 벌겠다는 목적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경영학 석사(MBA)학위를 받고는 미국 2~3개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뒤 교육부 교육행정사무관 시험에 합격,고국으로 돌아왔다.

잠시도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는 그의 생활방식은 기업가로 변신한 뒤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중국 미국 등 해외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국 현지법인에 상주하고 있다. 1년의 3분의 2는 중국과 미국에서,나머지 3분의 1은 비행기와 한국에서 보내는 숨가쁜 일정이다. 이처럼 바쁜 와중에도 베이징 어언대학 어학당에 등록,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최대 잠재시장으로 꼽히는 중국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다.

◆주부의 고민이 '빌리언 셀러'를

한 사회운동가는 스팀청소기를 '입식부엌 이후 남녀평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제품'으로 평가했다. 이 제품때문에 남자들이 걸레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찬사다.

두 집 가운데 한 곳꼴로 보유할 정도의 히트상품 신화를 일궈낸 스팀청소기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사업경험은 고사하고 문과 출신으로 과학기술에 문외한인 그는 "로켓도 만드는 세상인데 이 까짓 스팀청소기 하나 못 만들까"라는 생각으로 제품 개발에 나섰다. KAIST 등 국내 대학을 기웃거리며 자문을 구했지만 번번이 기술적 난관에 부딪쳤다. 집을 담보 잡힌 종잣돈 1억원으로 6개월이면 만들 것 같았던 제품 개발은 늦춰졌고,그 과정에서 시댁 · 친정집까지 저당 잡히며 쏟아부은 돈만도 6억원에 달했다.

"이러다간 혼자만 망하는 게 아니라 두 집안을 거덜내게 생겼다"는 위기의식때문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꼬박 3년의 제품 개발끝에 시제품이 나왔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제품 보일러 탱크의 누수 가능성 등 사소한 결함이 발견된 것이다. "이만하면 중소기업 제품으로는 나무랄 데 없고,앞으로 기술적으로 차차 보완하면 된다"며 주위에서 생산을 종용했다.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시제품 3000대 전량을 폐기처분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하자 제품을 단 1대도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는 오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마침내 생산을 시작했지만 제품은 창고에 쌓여만 갔다. 한 대표는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개발인줄 알았는데,그 보다 갑절은 힘든 게 유통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각개전투식으로 판로를 뚫은 결과 제품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2002년 20억원이던 매출이 다음해엔 40억원으로 불어났다. 그러다 홈쇼핑에서 대박이 터졌다. 주부들의 입소문 효과 덕분이다. 2004년 홈쇼핑에서 본격적인 방송을 시작한 이후 매출 100억원 장벽을 깨고 매년 2~3배씩 성장했다. 지금은 홈쇼핑뿐 아니라 백화점 · 대형마트 · 온라인쇼핑몰 등 다양한 유통라인을 통해 연 매출액만 1500억여원을 올리고 있다.

◆글로벌 시장은 또 하나의 도전

한경희생활과학은 몇년 전부터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 국내 누적판매량만 700만대(한경희생활과학 판매대수)에 달하는 스팀청소기는 경쟁업체 출현 등으로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교체 수요와 스팀다리미 · 살균기 등의 틈새품목만으로 회사 성장세를 이어가기가 버거운 상황.

결국 글로벌 시장 공략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미국의 거주문화가 카펫에서 원목 마루 등으로 바뀌며 스팀청소기 시장이 열리고 있다. 미국을 테스트 마켓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한 대표도 미국 시장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5년은 미국에서,10년 후에는 중국시장에서 먹을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2007년 미국 시장을 처음 노크했던 한경희생활과학은 현지 최대홈쇼핑사인 QVC를 통해 2008년 50억원에서 지난해엔 180억원어치의 스팀가전을 팔아치웠다. 할인점 등으로 판로를 넓히며 지난해 미국 매출액만 300억원 정도로 집계된다. 한 대표는 올해 미국의 매출목표를 최소 500억원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 200억여원 수준이던 중국 매출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주부 · 여성CEO로 사는 법

한 대표는 CEO이기 전에 아내이자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며느리와 딸로서의 직분을 잊어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며 "의지만 갖고 있다면 물리적 ·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정을 나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밤이나 주말에는 좀처럼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귀가, 책을 읽어주며 직접 재우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글로벌 시장공략 차원에서 지난해 말부터 중국법인이 있는 베이징에 상주하며 가족 전체가 베이징으로 이사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한 대표는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일과 가정 모두에서 충분히 내가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여자가 뭘 하겠어… 집에서 밥이나 하지"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창업을 한 뒤 정부자금을 빌리러 어느 신용평가기관에 찾아갔을 때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용평가 담당자의 첫 마디가 "되지도 않는 일에 힘 빼지 말고 살림이나 잘하라"며 "당신,이름만 걸쳐놓은 바지 사장 아니냐"며 괄시한 것.

한 대표는 중소기업 여성CEO로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로 '긍정의 힘'과 '여자도 할 수 있다'는 오기를 꼽았다. 그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유리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스스로 계속 담금질을 하는 이유는 나를 '롤 모델'로 삼는 수많은 일하는 여성들이 뒤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