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 나는 재미동포인 남편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게 됐다. 한국에서 결혼한 다른 이들이 배우자를 통해 한 가정의 문화와 환경에 적응해가듯,나 역시 배우자를 통해 문화,환경,언어에 적응해야 했다. 적응 단계에서 배우자가 취하는 태도는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내가 정착지인 미국에서 본 많은 남편들은 아내를 지나치게 배려해 자칫 의존적인 관계로 흐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가령 차로 어디든 데려다 주고,은행 일도 다 대신해 주는 등 남편 없인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아내들이 생겼던 것이 바로 그 예다.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아무리 독립적이라고 해도 타국까지 시집온 나를 좀 더 배려해주길 바랐으나,남편은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내 남편이 다른 남편들보다 사랑과 배려가 없어서라기보다,그이 역시 방향치에 운전도 젬병이어서 자상함을 발휘할 잠재력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겠다.

신혼 살림이 남편의 직장이 있던 뉴욕주가 아닌 뉴저지주에 차려졌기 때문에 남편 역시 결혼 전 살던 익숙한 곳이 아닌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그 덕분에 모임이 있어 낯선 곳에 가거나,장을 보러 차를 끌고 나가는 날에는 어김없이 길을 잃어 살벌한 할렘가를 헤매거나,일방통행 길에서 역주행을 해 '교통 대란'을 일으키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곤 했다. 차 없인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여건에서 그이의 운전 솜씨는 항상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퍼포먼스였고,그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처음부터 긴장된 결혼 생활을 경험한 나는 생전 관심에도 없던 지도를 보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한 나의 고군분투는 독립의 계기와 빠른 습득의 기회가 됐다. 스스로 터득하면서 강해지는 경험과 성취가 기쁨으로 다가왔다.

종종 일방적인 과잉 보호를 받는 사람은 무력감,자괴감을 느끼고,일방적으로 보살펴주는 사람 역시 피로감을 느끼는데,그런 부분에서 우리 부부는 이해와 타협과 양보를 잘 이끌어낸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 많이 배려해주는 배우자가 최고라고 하지만,정작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 공주나 왕비가 되는 것이 삶의 완성일까? 지속되는 사랑엔 일방통행이 없기 때문에,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부족함을 메워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

모두가 같은 캐릭터를 가진 게 아니므로 배려와 자상함의 범위도 각기 다를 것이다. 지도를 못 보는 나의 남편은 대신 문학과 미술에 해박했다. 그 덕에 미술 작품을 보며 작가와 시대상에 대해 얘기하고,밤새워 카프카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감성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줬다. 그것이 다른 사람 아닌 그이가 나에게 준 행복이다.

관계에 정해진 역할은 없다. 그것이 관계하는 당사자가 정한 것이 아니라 관습이나 고정관념에 의해 정해진 역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김혜정 듀오정보 대표 hjkim@duo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