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세트 메이커들의 슬림화 경쟁이 한창이던 2008년 말.삼성전자 VD사업부는 어떻게 하면 TV두께를 더 줄일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얇게 만들기 위해선 핵심부품의 슬림화가 뒤따라줘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LCD TV의 메인보드와 서브보드 사이의 데이터 전송 역할을 하는 FFC(Flexible Flat Cable)라는 부품이 관건이었다. 슬림화를 위해선 메인보드와 서브보드 위치를 조정해야 하는데 FFC는 직선 모양이어서 얇은 디자인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

케이블이 구부려지거나 꺾이면 두께는 줄일 수 있지만 데이터 전송속도가 느려지는 게 문제였다. 뭔가 대안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삼성전자는 구부릴 수 있는 인쇄회로기판인 FPCB(Flexible PCB)에 착안했다. FFC에 비해 FPCB는 데이터 처리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형태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었다.

◆휴대폰 부품 '발상의 전환'

지난해 1월,삼성전자는 국내외 8개 FPCB업체를 대상으로 기술입찰을 실시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 납품업체는 플렉스컴을 포함한 두 곳으로 결정됐다. 하경태 플렉스컴 대표는 "업계에서 FPCB는 휴대폰에만 쓰이는 부품이란 생각이 많았는데 FFC를 대체해 TV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세트메이커의) 발상의 전환에 우리가 가장 빨리 대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플렉스컴이 내놓은 TV용 FPCB(부품명 VD 케이블)는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을 흡족하게 했다. FFC에 비해 형태변경이 쉬워 슬림형 LCD TV 제작이 가능해진데다 삼성전자의 '야심작'이었던 두께 29.9㎜의 LED TV에도 최적의 기능을 갖췄기 때문이다. 올해 초 삼성전자가 내놓는 3D(3차원) TV에도 이 부품이 쓰였다. 세트메이커와 부품업체의 이해타산이 딱 떨어진 셈이다.

성과도 놀라웠다. 플렉스컴이 VD케이블을 삼성전자에 본격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2월.그 후 1년간 누적 공급물량은 1100만개에 달하고 있다. 같은 기간 VD케이블로 TV 슬림화에 성공한 삼성전자는 전 세계적으로 2700만대의 LCD TV(LED TV 포함)를 팔았다. 2008년에 비해 600만대 이상 늘어난 규모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삼성' 브랜드를 단 TV 2.5대 중 1대에는 플렉스컴 부품이 쓰인 셈이다.

◆매출 1년 새 2배로 급성장

VD케이블의 '대박'은 플렉스컴의 경영 성적표도 바꿔놓았다. 2007년 647억원,2008년 757억원이던 연 매출은 지난해 1345억원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영업이익도 2008년 49억원에서 지난해 122억원으로 3배가량 뛰었다. 신장우 플렉스컴 경영지원본부장(이사)은 "VD케이블은 개당 가격이 약 3달러로 이 부품 하나만으로 1년간 3300만달러(약 360억원)를 벌어들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실적 전망도 밝다. 삼성전자가 LCD TV에 이어 LED TV와 3D TV 생산물량을 대폭 늘리면서 플렉스컴 매출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경태 대표는 "지금 추세라면 연말까지 2500만개 이상의 누적 공급물량을 기록할 것"이라며 "올해 연간 경영목표도 매출 1800억원에 영업이익 170억원가량으로 높여 잡았다"고 말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