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눈감고 세상 보는 맹인 검객…애드립 신경썼죠"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 걸작.'

이준익 감독의 사극 대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9일 개봉)을 시사회에서 본 전문가들의 평가다. 박흥용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임진왜란 직전 스스로 왕이 되고자 봉기한 반란군 수장 이봉학(차승원)과 그에 맞서는 맹인 검객 황정학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황정학 역으로 열연한 '천의 얼굴' 황정민은 "할리우드 영화 '아이언맨2'와 흥행 경쟁을 펼치게 됐다"며 "극장가에 손님이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황정민을 만났다.

"2년 전 시나리오를 봤더니 대사와 지문이 짧고 단순해 배우가 채울 수 있는 여백이 많더군요. 깨알같은 지문은 배우를 틀에 가둬놓거든요. '황정학은 뵈는 게 없으니 내 맘대로 할게요'라고 감독님께 얘기했습니다. 연기의 3분의 1은 애드리브예요. 한바탕 논 거죠."

그는 처음부터 '맹인 검객은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항상 받아치는 검술에 초점을 맞췄다. 두 팔의 사정권에 들어오는 칼을 춤 같은 동작으로 쳐낸 것.온갖 장난기까지 동원했다. 그의 액션에서 해학과 웃음이 뿜어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숨돌릴 틈 없이 무겁게 전개되는 액션 마디마디에 관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오아시스를 제공한 것이다.

"제자 견자(백성현)를 칼잡이로 키우기 위해 무수히 때리면서 가르쳤지요. 애드리브로 장난 삼아 때리는 연기를 하되,덜 아프게 때리는 방법을 많이 생각했죠.늘 농담조로 이야기하고 목숨을 건 대결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캐릭터를 보여줬습니다. "

그는 연기를 위해 장애인 학교에서 보름 정도 수업을 참관했다. 그들의 행동을 캠코더로 찍기도 했다. 본 것과 안 본 것은 천지차이기 때문이다. 점자 대본을 장애인들에게 주고는 캐릭터에 대한 검증도 받았다.

"맹인 검객의 칼집 겸 지팡이를 원래는 짧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겨드랑이까지 와야 몸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새로 제작했죠.와이어를 쓰지 않은 맨몸 액션을 펼치느라 3개월 내내 칼싸움 안무를 연습했습니다. "

아이러니컬하게도 맹인 검객의 통찰력은 극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반란군 수장 이봉학이나 당쟁으로 분열된 남인 · 서인 등은 모두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다. 사소한 이익을 위해 큰 꿈을 저버린 인물들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발목 잡혀 싸우는 당쟁은 오늘날의 정치권과도 흡사하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같습니다. 아이러니죠.눈을 감고도 세상을 관조하는 황정학과 눈을 떴지만 관조할 수 없는 이봉학을 대비시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황정학은 조선시대의 실존 인물이랍니다. "

영화 '달콤한 인생'의 비열한 사장,'너는 내운명'의 순진한 농촌 총각,'구르믈…'의 해학적인 맹인 검객까지 황정민은 극중 캐릭터에 깊이 빠져들고 동화되는 타입이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자신의 이미지를 가져가는 송강호와는 정반대다.

"연기 패턴이 다른 거죠.저는 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본을 분석한 뒤 역할의 바다에 풍덩 빠집니다. 믿고 빠지면 물 위에 뜹니다. 그러다 '이건 너무 황정민스러운데'라고 생각되면 빠져 나왔다가 다시 들어갑니다. 왔다갔다하고 분장을 해보면 나도 모르게 캐릭터에 착 달라붙습니다. 황정학이 된 느낌을 받는 순간 신명나게 놀지요. 그러나 촬영이 끝나면 싹 잊어버려 후시녹음을 잘 못하는 게 약점입니다. 감독한테 늘 욕을 먹지요. 하하."

그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스토리를 찾는다. 관객들에게 스스로의 삶과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가 없다면 배우란 직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날선 듯한' 숀 펜을 좋아한다는 그는 "황정민이 출연한 영화라면 돈 아깝지 않다"는 말을 듣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