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밖은 꽃천지다. 봄꽃이 다투어 봉오리를 터뜨린다. 자꾸 창밖을 보게 된다. 어딘가로 떠나고만 싶다. 그러나 나갈 수 없다. 바쁘고, 일이 많다.

사시사철 갇혀 산다. 작가 조정래는 '글감옥'에 갇혀 산다고 했다. 키높이를 상회하는 글을 쓰고도 그는 또 새로운 장편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감옥에 갇혀 사는 일이 그닥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여름은 더워서, 겨울은 추워서, 밖에 나가기 싫다지만 봄이나 가을 풍광은 사뭇 유혹적이다. 갇혀 사는 생활이 새삼 심난하다. 그래도 작가들은 부러 창을 외면한다. 창을 등지고 벽을 향한다. 창에 두꺼운 커튼을 드리우고 한낮에도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글을 쓰는 이는 소설가 김경욱만도 아니고, 작가들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고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한때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의, 커다란 외항선 밑바닥에서 몇 개월이고 음식을 만들던 조리사였다. 그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식당을 차렸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주방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얼굴 한번 보려면 그의 식당엘 찾아가야 하고, 그는 비로소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마중나온다. 그래봤자 홀까지만이다. 그의 식당 밖에도 지금쯤 목련이 한창일 것이다.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친구의 방문이 그에게는 한줄기 바깥바람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을 쓰고 읽는 게 일이므로 책이라는 게 한줄기 바깥바람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택배로 받아 표지를 펼친다. 그럴 때 세상과의 통로가 간신히 조금 열린다. 바깥과 소통하는 어쩌면 유일한 틈. 작고 좁은 틈이지만 책에서 끼쳐오는 바람은 신선하고 소중하다. 촉촉한 기운이 감돌고, 방안의 물건들이 부스스 잠을 깨고, 연두빛을 머금는다. 비로소 작은 세상이 열린다.

사람살이의 고단함과 권태로움을 견디는 한 방법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윤작(輪作)의 원리를 설명한다. 하염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 밖으로 떠도는 대신, 하나의 땅을 터전으로 번갈아 다양한 씨를 뿌리는 것이다. 바깥에서 구할 것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안에서 발견하고 가꾸는 것.

언제까지나 바깥 것을 좇아 움직이면 그 바깥 것의 간섭과 제약을 받게 되고, 결국 유한성을 면할 길 없어 완전한 자기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한다.

농경이 반드시 유목보다 발전된 삶의 양식이라곤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산업사회가 농경사회에 비해 진보한 영위형태(營爲形態)라고도 볼 수 없다. 어디든 얼마간의 곤고함과 행복은 있게 마련이다. 곤고함과 행복의 근거를 바깥에 두느냐 안에 두느냐가 다를 뿐이다.

안에서 찾는다면 유목민에게든 현대인에게든 마당 하나로도 충분할 것이며, 밖으로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 세상은 한도끝도 없어질 것이다.

농경과 유목으로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인은 아파트에서 먹고 자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사무실이나 공장의 작업장에서 하루를 보낸다. 어느 쪽이 더 살만한 삶인가에 대해 말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은 물리적인 삶의 반경 혹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긴 해도 반드시 그것에 갇히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큰 마음이 작은 것을 헤아리고 보살핀다. 그러하듯 작은 공간을 자각할 때 비로소 큰 하늘을 품을 수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갇혔다고 하여 반드시 한숨 쉴 일만은 아니다.

같은 산 같은 마당에 철따라 다른 꽃이 피고 풍경은 시시각각 변한다. 자신의 권태로움을 저 스스로 견디는 지구의 방식은 그토록 찬란하다. 바야흐로 꽃천지다. 내 안에 꽃 피울 작은 밭 하나 있다면, 들이쉬는 숨 한 모금으로도 능히 우주를 호흡할 수 있지 않을까.

구효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