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해운회사들이 가까스로 적자에서 벗어나 올해 실적 개선을 앞두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경기회복에 따른 물동량 증가와 운임 상승 덕분이다.

하지만 이들 회사 경영진의 고민은 여전히 깊다. 글로벌 해운시황이 회복세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선박 발주에 나서기에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금융권이 돈 빌려주길 꺼리는 데다 설사 융자를 받더라도 부채비율이 높아져 금융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국내 해운업계의 처지다.

업계에서는 한국 해운업이 지금 갈림길에 놓여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대로 안주할 것이냐 아니면 규모를 확장할 것이냐'의 고민이다. 아시아~유럽 노선의 운임이 2008년 수준을 회복하자 해운업체는 투자를 늘리려 하고 있다. 반면 정부와 금융권은 '과속은 금물'이라는 입장이다.

◆뛰는 해외 선사,기는 국내 선사

세계 5위 대만 해운회사인 에버그린의 장룽파(張榮發) 회장은 지난 14일 "8000??(1??는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급 컨테이너선 32척을 포함해 총 100척의 선박을 발주한다"고 발표했다.

이진방 한국선주협회장 겸 대한해운 회장이 "그럴 리 없다. 오보가 분명하다"고 말할 정도로 업계에 미친 파장은 컸다. 지난해 금융 위기로 에버그린처럼 덩치가 큰 선사일수록 타격이 컸기에 나올 수 있는 의문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해운업 특성상 대규모 금융 지원이 없으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국영 선사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코스코와 차이나시핑이 정부로부터 각각 150억달러,20억달러의 금융 지원을 받았다. 글로벌 선박 브로커이자 조선 · 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금융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선사들은 올 들어 41척의 선박을 발주,이미 지난해 1년간 발주 물량(50척)에 육박했다.

업계 관계자는 "해운업은 불황과 호황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카운터 사이클 비즈니스"라며 "글로벌 선사들은 조만간 업(up) 사이클이 올 것으로 보고 선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해운업체,정부,은행 '온도차'

국내 선사들의 판단도 에버그린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컨테이너선사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태평양 노선의 운임이 다음 달 화주들과의 협상에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한진해운 등 주요 선사들은 큰 폭의 흑자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적자 산업'이란 굴레에 묶여 투자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내 중소 해운회사인 A사의 자금담당 A부장은 선박 신규 발주를 위해 은행권에 찾아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은행이 지난해 재무제표에 근거해 자금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은행만큼 보수적이진 않지만 정부 역시 신중론을 펴고 있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한진해운 등 국적선사들이 보유한 선박은 2008년 말 828척(2200만GT)에서 작년 말 861척(2400만GT)으로 늘어났다. 과도한 투자는 자칫 화를 부를 수 있다는 논리의 근거다.

지난해 산업은행과 자산관리공사를 통해 1조원씩 총 2조원을 지원키로 결정하는 등 더 이상 내놓을 해운업 지원책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정부로선 고민이다. 2조원 가운데 벌써 40%가량을 집행했다. 선박보증기금을 설치하자는 안도 나왔지만 누가 출자할 것인가를 놓고 검토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추가 지원은 다른 산업과의 균형을 감안할 수밖에 없고,은행 지원은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양홍근 한국선주협회 이사는 "정부가 이미 내놓은 지원책을 속히 집행하는 게 최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