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인 큰 딸이 대학을 마치는데 4년간 약 8000만원 들어갑니다. 둘째 딸 학비에다 결혼자금까지 감안하면 은퇴 전에 2억원 이상 목돈을 준비해야 합니다. "

직장인 황인성씨(45)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언제 은퇴할 지 모르는데 노후대비는커녕 중고생인 두 딸의 대학 학자금과 결혼자금 마련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인사관리 파트 고참 부장인 그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준비하는 것은 국민연금과 월 25만원씩 붓는 개인연금 저축이 전부다.

황씨는 퇴직금을 조금이라도 불려보려고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펀드에 가입했다. 회사가 적립해 주는 퇴직금을 우량주에 투자, 운용성과에 따라 퇴직급여를 받는 방식이다. 그런데 세제 혜택은 전혀 없다. 퇴직연금은 개인연금과 합쳐 연간 300만원까지만 소득공제된다. 궁여지책으로 장기주식형펀드에 가입해 자녀의 학자금에 보태기로 했다. 그러나 연 1200만원까지 납입액의 5~20%를 소득공제해 주던 혜택도 지난해 말 사라졌다. 두 딸 이름으로 펀드를 들어 장기투자하려고 했지만 역시 미성년자 증여세 면제한도(10년간 1500만원) 외엔 다른 혜택이 없다.

◆장기투자 세제혜택 없는 한국


황씨처럼 펀드에 장기투자 하는 사람들이 세제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게 한국 펀드시장의 현실이다. 지난해 말로 장기주식형펀드 신규가입자에게 적용하던 소득공제 혜택이 사라졌다. 해외투자펀드 비과세 혜택도 없어졌다. 장기간 펀드에 투자해도 세금면에서 혜택을 볼 게 전무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장기투자를 유도하면서 중산층을 확대하고 고령화시대 노후대비를 돕기 위해선 선진국 수준의 세제혜택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은 "국민들이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하면 나중에 국가의 재정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며 "장기주식형펀드에 대한 세제혜택을 주는 것은 펀드시장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에 건전 재정을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말했다.

펀드평가회사 제로인의 최상길 전무도 "중산층 이하의 재산형성과 노후 대비를 위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밑도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세제혜택을 줘야한다"고 주장했다. '중산층을 두텁게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도 세제혜택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현행 세제는 금융소득에 대해 과세대상 이익의 14%를 원천징수하도록 돼 있다. 금융소득이 연 4000만원 이상인 경우 최고세율인 35%로 종합과세한다. 장기투자펀드에도 일반 상품과 똑같은 세율을 적용하면 투자 메리트가 없어 가뜩이나 주식은 물론 펀드까지 단타매매 대상으로 삼는 조급한 투자행태를 바꾸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장기펀드와 변액보험 형평성 논란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는 것이 변액보험과 장기투자펀드의 조세 형평성이다. 현행 소득세법에는 10년 장기저축성 보험을 비과세하도록 돼 있다. 여기에는 변액보험이 포함된다. 같은 장기 투자자라도 변액보험 가입자는 혜택을 받지만 장기투자펀드에 투자한 사람은 세금을 내야 한다.

이중길 금융투자협회 신탁판매지원실장은 "변액보험은 자본시장법 상 집합투자기구로 펀드와 똑같은 실적배당 상품"이라며 "10년 이상 매달 100만원 이내를 납입하는 장기펀드 투자자에게는 변액보험과 동일한 비과세 혜택을 줘야한다"고 말했다.

연금저축에 주는 소득공제 혜택도 선진국 수준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2001년 개인연금에 대한 비과세 혜택이 폐지되고 연간 240만원 소득공제로 바뀌었다. 2006년 퇴직연금을 포함해 연금저축에 대한 소득공제가 연간 300만원으로 상향조정됐지만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선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이호찬 금투협 세제팀장은 "미국의 퇴직연금계좌(IRA)는 기본적으로 비과세 혜택이 주어진다"며 "회사와 직원이 함께 불입하는 미국의 401K의 경우 최고 2만2000달러(약 2400만원)까지 소득공제를 해주며 호주의 퇴직연금 슈퍼애뉴에이션의 경우 소득공제 한도가 연간 5만 호주달러(약 5000만원)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면허세 · 교육세 등 세금폭탄까지

증권 · 운용사에 대한 '세금 폭탄'도 논란거리다. 작년 5월 지방자치단체들은 펀드를 등록하도록 한 법령을 근거로 모든 펀드에 면허세를 부과했다. 작년 3분기부터 증권 · 선물회사들은 연간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교육세를 내고 있다. 가뜩이나 장기투자 상품에 대한 세제혜택이 전무한 가운데 새로운 세금 신설로 결국 투자자들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난달 말 진동수 금융위원장과 금융투자업계 대표와의 간담회에서 장기투자펀드에 세제혜택을 달라는 건의문이 전달됐다. 그러나 세수 확보에 밀려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노동부는 퇴직연금과 장기투자 상품 활성화를 위해 각종 세제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세제를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세수 확보를 우선시해 장기투자 세제혜택을 부활하는 데 미온적이다. 결국 정부가 펀드 투자자를 단타매매로 몰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최명수 기자 m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