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헤엄치고,새는 날고,인간은 달린다. " 1952년 헬싱키 올림픽 5000m,1만m,그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체코의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말이다. 진화론적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은 생존을 위해 광활한 정글과 평야를 질주했던 타고난 장거리 주자였다고 한다. 인간은 힘이 세지 않고,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진 것도 아니고,치타처럼 아주 빨리 달릴 수도 없다. 그래서 사나운 맹수들과의 생존경쟁 속에서 육체적으로 나약한 인간이 발견한 것은 결국 오래 달리는 방법 밖에 없었던가 보다.

그렇지만 나에게 달리기는 다소 거리가 멀다. 운동에는 젬병인 40대 아줌마에게 달리기가 친해질 리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지만 난 달리기가 익숙하지 않은데다 잘 달리기도 힘들어 별로 아쉽진 않다. 사실 꼭 빨리 달려야 맛인가. 난 빨리 달리지는 않지만 느리게 달린다. 나는 걷는다.

나의 걷기는 통상 오후 9시부터 10시 사이에 시작된다. 걸으며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같이 걷는 사람들과 대화한다. 인생도 동반자가 있을 때 더 행복한 것처럼 좋은 사람과 걸을 때 그 행복은 배가 된다.

공자는 논어의 첫 문단에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멀리서 벗이 찾아오는 기쁨을 표현했다. 그런 면에서 난 공자님보다 운이 좋다. 지척에 살면서 저녁이면 모여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어서다. 건강과 다이어트라는 거창한 명분은 세워 두었지만,우리는 서둘러 걷지 않는다. 보폭을 맞추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애들 학교,남편 건강,직장 생활 등 대화 주제는 끊이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앞으로도 더욱 빠른 속도로 바뀔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되뇌고 산다 하더라도 그런 변화가 편하게 느껴지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변화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게 마련이며 나 또한 그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제 내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나의 늦은 퇴근 시간에 맞춰 늦은 밤 동행을 자처해 준 친구들은 짧은 만남이 아쉬웠던지 나의 집으로 또 다른 친구의 집으로 서로를 배웅한다. 집 앞까지 와서도 아쉬운 마음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또 다른 친구를 배웅하러 따라 나서며 우리만의 작별의식을 하고 있는데,늦은 밤 퇴근하던 J의 남편과 집 앞에서 마주친다. "아이고.내일도 볼 얼굴들 애달파서 못 헤어지고들 계십니까? 하하.저도 같이 걸을 친구 하나만 주셨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하며 J의 남편이 J를 데리고 가서야 우리의 걷기는 끝이 난다.

자신의 일을 갖고,인생을 멋지게 혼자 살아가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동행이 있을 때 그 길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나는 오늘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걷기를 계속한다.

김혜정 듀오 대표 hjkim@duo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