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부활이냐 몰락이냐》는 독일 학자 프랑크 쉬르마허가 펴낸 책 제목이다. (한국에도 2006년 번역 소개됐다. ) 책을 펼치면 평소엔 잊고 지내지만 위기상황이 다가올수록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는 가족의 의미에 대한 흥미진진한 사례가 풍성하게 등장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사례 하나. 독일의 이름난 휴양지에서의 실화다. 여름 휴가철,그 날도 3000여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는데,원인을 알 수 없는 누전 사고로 인해 휴양객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심하게 다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와중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이 300여명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가족끼리 어울려 휴양지를 찾은 경우로 밝혀졌다.

이 사실에 호기심을 느낀 누군가가 불에 타다 남은 CC TV 테이프를 입수해 분석해본 결과,흥미로운 장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다수 휴양객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은 친구든 낯 모르는 사람이든 개의치 않고 어울렸으나,일단 위기 경보가 울리자마자 저마다 놀던 것을 멈추곤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 포착됐던 것이다. 위기를 감지하자마자 곧바로 사람들 뇌리를 스쳐간 대상이 바로 가족이었음은 물론이다.

쉬르마허의 결론인 즉,가족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약자를 향한 이타적(利他的) 양보와 무조건적 배려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오늘날과 같은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약자 보호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유지해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데 바로 이들 환금성(換金性)과 무관한 공동체로서의 가족 가치를 상실할 때,결국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란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 쉬르마허의 경고이자 충고였던 셈이다.

지금까지 가족이 공동체로서의 생명을 유지해오는 동안 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일방적 희생을 자연의 법칙인 양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를 여성들 어깨 위에 짐지워 왔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일방적 희생과 헌신의 불공정함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그 여파로 약자 보호라는 가족 공동체의 핵심적 기능이 표류하게 됐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부양과 양육의 '상품화'인 셈이다. 덕분에 어린아이를 돌보는 필리핀 가정부가 더 이상 낯설지 않고,노인 환자를 돌보는 조선족 간병인 또한 흔한 풍경이 됐다. 이제 아이들은 걸음마를 시작하는 순간의 감격을 엄마 대신 도우미 아줌마와 함께하고 있고,노인들은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을 낯 모르는 호스피스 손을 잡고 맞이하게 됐다.

5월 달력을 펴면 5일 어린이 날을 시작으로,8일 어버이 날,11일 입양의 날,15일 스승의 날,17일 성년의 날을 거쳐,21일 부부의 날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연관된 기념일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아이들 선물 챙기랴 부모님 용돈 채워 드리랴,5월만 되면 주머니 사정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반비례해 무거워만 간다는 푸념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가족의 의미를 새삼스레 기억해야 하는 날들이 점차 늘어가고,서로 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점차 정교화되고 있는 요즈음,결혼율과 출산율은 꾸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이혼율은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가족 자체가 위기에 놓이는 순간 정작 위기로부터 우리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줄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리게 됨을 기억할 일이다. 공동체로서의 가족 가치를 복원하는 일,그건 희생과 헌신,양보와 배려를 가족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나눌 때 가능한 일임을 또한 명심할 일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