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초 일본 도쿄 시내 고지마치에 있던 영국 변호사 개스비의 집.20년 동안 고려청자를 모아 온 개스비 변호사가 자신의 애장품을 하나씩 탁자 위에 올렸다. 원숭이연적,기린 모양 향로,오리 연적,포도 잎과 포도 알이 가득한 매병….그가 내놓은 청자는 모두 22점.하나같이 명품이었다.

서른 한 살의 조선 청년은 속으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개스비는 청자를 일괄 구입하려는 청년에게 한 점당 2만5000원씩 55만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년은 33만원을 제시했고 사흘 동안의 실랑이 끝에 협상은 결렬됐다.

두어 달 뒤,이번에는 개스비가 서울로 왔다. 개스비는 청년이 성북동에 짓고 있던 조선 최초의 개인박물관 공사 현장을 보고 나선 자국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에 감동해 조정안을 제시했다. 청자 22점 가운데 소품 2점을 뺀 20점을 40만원에 넘기는 것으로 마침내 거래가 성사됐다.

40만원이면 당시 서울의 번듯한 기와집 400채를 살 수 있는 돈.요즘의 서울 아파트값을 최소 시세인 3억원으로 쳐도 1200억원,한 점에 60억원을 주고 산 셈이다. 충남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팔아 돈을 마련한 청년은 비행기를 전세 내 도쿄로 가서 청자를 싣고 왔다. 명품청자 20점은 이렇게 우리 땅으로 돌아왔고 이 중 7점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간송 전형필》은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이자 조선 제일의 수장가로 손꼽혔던 간송 전형필(1906~1962년)의 삶과 문화재 수집 이야기를 복원한 평전이다. 저자는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다.

그는 1996년 간송미술관 개관 25주년 기념전에서 간송을 처음 만난 이래 간송의 삶에 매료돼 10년 이상 자료를 모으고 연구 · 조사 및 취재,간송 집안의 출판 동의와 도판 협조,감수와 자문을 거쳐 그의 삶을 복원했다. 간송이 부모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고도 일신의 영달 대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던 이유,국보급 명품과 보물을 되찾기 위한 승부의 명장면 등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한다. 간송과 그가 수집한 유물 사진 100여장이 생생함을 더한다.

간송은 와세다대 법학부 3학년이던 1929년 갑자기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갑부가 됐다. 물려받은 재산은 논만 4만 마지기.한 해 수확이 4만 가마니,순수입이 15만원에 달했다. 논의 가치는 더했다. 당시 논 한 마지기가 50원이었으므로 4만 마지기면 200만원,요즘 아파트 시세로 치면 최소 6000억원이다.

그러나 간송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일본으로 속속 빠져나가는 옛 글씨와 그림,서적,불상과 탑,부도 등을 사 모았다. 어린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고서화 감식가였던 위창 오세창,이종 형이던 월탄 박종화,스승이던 춘곡 고희동 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간송은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세기의 보물인 '훈민정음'(국보 제70호),겸재 정선 · 현재 심사정 · 단원 김홍도 · 혜원 신윤복 · 오원 장승업 · 추사 김정희 등 거장의 걸작들을 수집하며 그야말로 억만금을 들였다. 그리고 간송미술관을 지어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소장,연구,전시했다.

소장품 중에는 국보 12점,보물 10점 등 국가지정문화재만 22점이나 있다. 기와집 120채 값(12만원)을 주고 산 금동삼존불감은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공개하지 못하다가 간송이 세상을 떠난 후 삼국시대 삼존불과 함께 국보 제73호로 지정됐다.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을 입수한 간송은 이를 자신의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그는 한국전쟁 때에도 이를 품고 피난 갔고,밤에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고 한다.

참기름병에서 국보가 된 청화백자,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였던 한남서림,현해탄을 건너가 찾아온 '혜원전신첩',용인의 친일파 거두 송병준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의 '해악전신첩',간송을 진심으로 도왔던 이순황과 일본인 거간 신보 등의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맨 처음 서화 전적을 수집하려는 간송에게 위창이 까닭을 묻자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라고 간송은 대답했다. 이런 간송에게 위창은 "조선은 꼭 독립된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라며 용기를 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3년 간송이 성북동에 터를 구해 간송미술관을 지은 것도 독립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간송은 예전처럼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조선 사람 누가 모아도 조선 것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마다 전시가 열리는 봄,가을이면 10만 관람객이 운집하는 간송미술관은 여전히 최고의 소장품을 자랑한다. 간송은 민족의 자존심과 혼을 수집했기 때문이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