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엄마 어깨에 매달린 '평생 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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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축하 가족들과 일본 여행
자식이란 짐의 무게 이제 깨달아
자식이란 짐의 무게 이제 깨달아
일본 교토와 오사카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그곳은 내게 초행이었고,만약 혼자였다면 좀 다른 일정을 보냈을 것이다. 다사이 오사무가 게이샤와 함께 벚꽃 휘날리는 강물 위로 투신한 다마카와 강변을 걸으며,어린 내 영혼을 사로잡았던 <<사양(斜陽)>>의 탐미적인 문장을 떠올리는 건 교토에 대한 내 오랜 로망이었다.
노인네를 동반한 패키지 여행에선 이런 일정은 용서되지 않는 법.명승지보다는 조촐한 절을 기웃거리며 인적 없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겠다는 소망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다. 애초에 엄마의 팔순을 기념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일행은 다섯.딸과 며느리까지 모두 여자들이었다.
연례행사는 아니었다. 여행은커녕,멀다는 핑계로 늘 용돈 조금 부치는 걸로 끝낸 세월이었다. 두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팔순이라고 잔치를 벌일 형편이 아니었다. 혼자 되신 엄마에게도,막 아버지를 잃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필요했다.
좋든 싫든 내 앞엔 얼마나 많은 여행이 남아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같이하는,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 생각했다. 그저 엄마의 손을 잡고,엄마의 속도로 걸어야지.한 사흘,평생 못다한 효도를 해치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마저 있었다.
차창 밖의 다마카와는 짐작보다 작아 강이라기보단 내에 가까웠다. 천변(川邊)을 따라 죽 늘어선 벚나무의 꽃은 졌고 이제 신록이 한창이었다. 어쩐지 나는 다사이 오사무 대신 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적은 연세가 아니었는데 나는 어쩜 한번도 그리 갑자기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가게에 놓인 양갱을 보자 유난히 단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이제 저걸 사서 보낼 일은 없겠구나.
버스 기사가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CD를 들려줄 때엔 그녀의 노래 대신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안사코 우느흔구나 박달재의 그흐흠보오오옹아." 술 드신 날이면 과일 몇 알이나 과자 한 봉지를 들고 돌아와선 끝도 없이 부르던 구성진 노래들.그 유행가 가락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회한(悔恨)으로부터 눈물이 흘러나왔다.
유순한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다마카와를 걷는 대신,엄마의 손을 잡고 금각사와 청수사를 구경했다. 계단이 많은 곳에서는 그냥 둘이 앉아 기다리자 했으나 엄마는 언제 또 오겠냐며 벌떡 일어섰다. 봄 햇살 아래 엄마의 잔주름은 유난히 선명했다. 무릎을 벌린 채 천천히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가끔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지만,그것은 청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적 능력의 쇠퇴에서 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제 아이가 되었는데,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배추를 키워 담근 김치를,손수 띄운 청국장을,가장 싱싱한 멸치로 담근 젓갈을 보내주기엔 엄마는 너무 쇠약해 있었다. 내 자식만 내가 지고 가야하는 '장기 배낭'이라 생각했지,내가 엄마의 어깨에 매달린 '평생 배낭'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아.팔순의 엄마를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박달재의 금봉이마냥 한사코 울어대는 착한 딸로 3박4일을 고스란히 보낸 딸이었다면,회한 따위 없겠지.
엄마.시끄럽게 코 곤다고 따로 재운 것,노천 온천에서 피곤하단 엄마 먼저 내보내고 우리끼리 수다 떨다 늦은 것 용서해주세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신사이바시 거리 맥도날드에 앉혀놓고 레몬티 한 잔 들려주고는,올 때까지 꼼짝하지 마,길 잃으면 큰일 나,협박해 놓고 쇼핑하러 달려간 것도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또, 또, 또 …. 한 사흘 잘못한 게 이 정도니,용서는 그만 구하고 대신 다른 얘길 할게요.
내 하나뿐인 엄마.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거예요.
정미경 <소설가 >
노인네를 동반한 패키지 여행에선 이런 일정은 용서되지 않는 법.명승지보다는 조촐한 절을 기웃거리며 인적 없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겠다는 소망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다. 애초에 엄마의 팔순을 기념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일행은 다섯.딸과 며느리까지 모두 여자들이었다.
연례행사는 아니었다. 여행은커녕,멀다는 핑계로 늘 용돈 조금 부치는 걸로 끝낸 세월이었다. 두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팔순이라고 잔치를 벌일 형편이 아니었다. 혼자 되신 엄마에게도,막 아버지를 잃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필요했다.
좋든 싫든 내 앞엔 얼마나 많은 여행이 남아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같이하는,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 생각했다. 그저 엄마의 손을 잡고,엄마의 속도로 걸어야지.한 사흘,평생 못다한 효도를 해치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마저 있었다.
차창 밖의 다마카와는 짐작보다 작아 강이라기보단 내에 가까웠다. 천변(川邊)을 따라 죽 늘어선 벚나무의 꽃은 졌고 이제 신록이 한창이었다. 어쩐지 나는 다사이 오사무 대신 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적은 연세가 아니었는데 나는 어쩜 한번도 그리 갑자기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가게에 놓인 양갱을 보자 유난히 단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이제 저걸 사서 보낼 일은 없겠구나.
버스 기사가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CD를 들려줄 때엔 그녀의 노래 대신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안사코 우느흔구나 박달재의 그흐흠보오오옹아." 술 드신 날이면 과일 몇 알이나 과자 한 봉지를 들고 돌아와선 끝도 없이 부르던 구성진 노래들.그 유행가 가락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회한(悔恨)으로부터 눈물이 흘러나왔다.
유순한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다마카와를 걷는 대신,엄마의 손을 잡고 금각사와 청수사를 구경했다. 계단이 많은 곳에서는 그냥 둘이 앉아 기다리자 했으나 엄마는 언제 또 오겠냐며 벌떡 일어섰다. 봄 햇살 아래 엄마의 잔주름은 유난히 선명했다. 무릎을 벌린 채 천천히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가끔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지만,그것은 청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적 능력의 쇠퇴에서 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제 아이가 되었는데,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배추를 키워 담근 김치를,손수 띄운 청국장을,가장 싱싱한 멸치로 담근 젓갈을 보내주기엔 엄마는 너무 쇠약해 있었다. 내 자식만 내가 지고 가야하는 '장기 배낭'이라 생각했지,내가 엄마의 어깨에 매달린 '평생 배낭'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아.팔순의 엄마를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박달재의 금봉이마냥 한사코 울어대는 착한 딸로 3박4일을 고스란히 보낸 딸이었다면,회한 따위 없겠지.
엄마.시끄럽게 코 곤다고 따로 재운 것,노천 온천에서 피곤하단 엄마 먼저 내보내고 우리끼리 수다 떨다 늦은 것 용서해주세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신사이바시 거리 맥도날드에 앉혀놓고 레몬티 한 잔 들려주고는,올 때까지 꼼짝하지 마,길 잃으면 큰일 나,협박해 놓고 쇼핑하러 달려간 것도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또, 또, 또 …. 한 사흘 잘못한 게 이 정도니,용서는 그만 구하고 대신 다른 얘길 할게요.
내 하나뿐인 엄마.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거예요.
정미경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