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고경영자(CEO)가 직장 상사이자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육성 고백을 싣습니다. 온고지신의 정신을 계승해 후배들이 한 단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충고의 마당이기도 합니다. 잊지 못할 그때 그순간을 되돌아보면서 성취의 보람,결단의 순간,실패의 아픔,재기의 희열 등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난 이른바 관운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대표 통신사(KT) 사장에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것도 모자라 대학총장(광운대)에 이어 이젠 LG그룹의 통신사업 수장까지 맡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훈장은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원(1982~1991년)이라는 자리.10여년의 미국 유학과 현지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30대 중반에 귀국해 취직한 곳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뭉클해진다.

ADD행은 필연적이었다. 당시 군 통신기술은 민간보다 훨씬 앞서 있었고 연구체계도 잘 갖춰져 있었다. 1989년 마흔을 갓 넘기면서 선임연구원으로 승진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무렵 국방부에서 갑자기 날아든 명령 하나가 평온했던 일상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국방부는 'FHMFSK(Frequency Hopping Multiple Frequency Shift Keying)'라는 최첨단 통신장비(무전기)를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일반적인 주파수 변조방식(FM)을 훨씬 뛰어넘는 기술이 요구되는 장비로,교신 중에도 디지털 암호코드가 자유자재로 주파수를 변경하도록 하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었다. 미국도 1985년에야 개발에 성공했을 정도로 기술적 난이도가 높았다. 전 세계적으로는 미국 영국 이스라엘 3개국만 보유 중이던 첨단 제품이었다. 가격은 대당 1만달러 수준.우리나라에 5만~10만대 정도가 필요했는데,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조원에 육박했다.

연구원들을 어렵게 한 것은 수입업자들의 방해공작이었다. 국산화가 이뤄질 경우 예전만큼 돈벌이가 안 될 게 빤히 보였던 수입업자들은 "한국은 첨단 보안 장비인 FHMFSK 무전기를 개발할 능력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국내외에서 공부를 한 연구원들도 의기투합했다. 모두 몇 달간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개발에 매달렸다.

운명의 테스트 날이 다가왔다. 국방부 특검단은 미 2사단 의정부 부대에서 미국 제품과 우리 것을 검증,비교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우리는 막 프로토 타입(시제품)을 만들었을 뿐이었지만 야전 시험을 요구해 제품을 들고 나갔다. 우리 제품 바로 옆에 미제를 탁 놓고 툭툭 쳐보더니 시험을 시작했다. 장비 전문가들이 이곳 저곳에서 '재밍'(jamming · 무선통신을 할 때 방해 신호를 보내는 것)을 걸었고,스위핑(sweeping · 도청을 위해 특수 장비를 이용해 통화하는 주파수를 찾는 것)도 시도했다. 두 제품 다 문제 없이 통화가 이뤄졌고 도청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자 심사위원들이 갑자기 재밍 파워를 3단까지 올렸다. 미처 예상치 못한 테스트였다. 우리 측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바로 그 순간, 미제가 '팍'하고 작동을 멈춰버렸다. 반면 '한국제'는 너무도 쌩쌩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미제를 추천했던 특검단 일부 인사들은 "말도 안 된다"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난 마음속으로 '말이 안 되긴,우리 것은 아직도 멀쩡한데…'라며 웃음을 지었다.

재밍 파워가 치솟던 짧은 순간.그 찰나의 시간에 숱한 불면의 밤들이 주마간산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청춘을 바쳤던 유학과 고단했던 이국생활,어릴 적 최고의 공학도를 꿈꾸며 집과 학교를 분주히 오갔던 시간들 말이다. 해질 무렵 최종합격 판정이 떨어지자 많은 연구원들은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제품은 우리 모두의 빛나는 훈장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보석같은 의미로 살아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 난에 등장한 FHMFSK 무전기를 아시겠는가. 또 그것의 상업적 변형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이라는 것을 아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