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촉발된 재정위기의 불씨가 유럽 전역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제2의 위기'에 대한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과 공포가 커져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들불'을 잠재울 수 있는 '슈퍼 소방수'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유럽중앙은행(ECB)이 아직까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ECB는 유럽연합(EU) 내 유로존을 대표하는 중앙은행이지만 경제 상황이 서로 다른 16개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큰 활약을 지켜봤던 글로벌 투자자들로선 재정위기 취약국인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보다도 ECB 자체를 향후 유럽 경제의 더 큰 불안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하나,재무부는 16개'

ECB는 1999년 유로화 출범에 따라 유럽 내 통화정책에 관한 집단 결정을 강화할 목적으로 2000년 설립됐다. 총재와 부총재,이사 4명과 유로존 16개국 중앙은행 총재 등 총 22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유로존의 기준금리 결정 등 통화정책 전반을 관리 운용한다. 반면 재정정책은 각 회원국 정부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공'이 위기 때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의견 조율의 어려움과 조직 장악력 및 독립성 약화라는 부작용이 불거진 것이다. 또 선진 대국인 독일과 프랑스부터 그리스나 몰타 등 경제적 약소국까지 모두 단일 통화를 쓰면서 유로존 내 경제 불균형을 극복할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아 위기 때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다.

◆턱없이 좁은 유동성 공급 범위

이 같은 태생적 한계 외에도 시장에서 ECB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이유는 ECB의 현행 규정상 유동성 공급 수단이 마땅치 않은 데다 그 범위도 매우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ECB는 채권 발행시장에서 개별 회원국의 국채와 회사채를 직접 사들일 수 없다. 다만 회원국 국채를 담보로 유로존 내 시중은행들에 자금 대출을 제공할 수는 있으며,유통시장에선 채권 매입도 가능하다. 지난해 6월부터 신용등급 'BBB' 이상의 600억유로 규모 커버드본드(선순위 보증부 채권)를 사들인 게 대표적 사례다.

원래 금융위기 이전엔 국채가 담보물로 인정받기 위해선 신용등급이 'A-' 이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ECB는 양적 완화 차원에서 2008년 가을 이 등급 하한선을 'BBB-'로 낮췄고,그리스 국채에 대해선 신용등급 제한도 두지 않기로 했다.

투자자들은 ECB가 재정위기 방어를 위해 이 같은 규정의 울타리를 넘어 특단의 대책을 제시해 주길 원했지만 ECB는 스스로의 역할 범위를 넘지 않은 채 '안전'을 더 중시해 시장을 실망시켰다. 특히 지난 6일 "국채 매입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의 발언은 시장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반면 미 FRB는 리먼쇼크 이후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과감하게 여러가지 극약 처방을 내놓으며 대규모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했다. FRB는 관련법인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에 따라 '특수한 상황(unusual circumstances)'에선 은행을 제외한 다른 금융사에도 긴급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다.

2008년 3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로 월가 금융사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상업은행이 아닌 투자은행에도 대출 프로그램을 적용하기로 한 결정은 이 같은 법적 권한에 따른 것이다. FRB는 당시 7월 투자등급 회사채를 담보로,10월에는 기업어음(CP)을 담보로 각각 금융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래도 신용위기가 해소되지 않자 그해 12월 기준금리를 제로금리(연 0~0.25%)로 낮추는 한편,모기지 증권 외에 국채까지 매입해주는 초강수 대책을 단행했다.

◆불량 회원국 제재 사실상 전무

ECB가 회원국들의 재정 건전성을 감시하고 재정 불량국을 제재할 방안이 사실상 없다는 점도 취약점으로 지적된다. 유로존 국가들은 1999년 맺은 'EU 안정성장협약(SGP)'을 통해 각국이 지켜야 할 재정적자 상한선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3%로 정했다. 또 ECB 규정에 따르면 각 회원국은 SGP를 위반했을 때 GDP의 0.2~0.5%를 벌금으로 내도록 돼 있다. 하지만 지난해 아일랜드(14.3%)와 그리스(13.6%) 스페인(11.2%) 등 재정적자가 GDP 대비 10%를 넘어선 국가들이 잇따랐지만 제재를 받은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미아 기자/뉴욕=이익원 특파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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