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유로존] '찻잔 속 태풍' 방심…EU·IMF가 '그리스 바이러스' 키웠다
그리스 재정위기가 처음 불거진 지난해 10월20일만 해도 시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유로화 가치는 작년 11월말까지 달러 대비 초강세(작년 11월25일 1유로=1.5139달러)를 이어갔다. 유로화 출범 초기(1999년 1월1일)와 비교하면 달러 대비 51.39% 절상됐다.

하지만 그리스 사태는 바람 부는 들판에 옮겨붙은 불처럼 급격하게 번져갔다. 그리스 위기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으로 전염될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면서 통화 가치가 폭락했다.

◆처음엔 '찻잔 속 태풍'

그리스 재정적자 문제가 드러난 작년 10월20일은 조기 총선에서 집권한 사회당 정부가 유럽연합(EU) 경제 ·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12.7%로 예상된다"고 밝힌 날이었다. 당초 시장에서 예상한 재정적자 비율(6%)보다 갑절이나 높은 수치였다.

순식간에 충격이 몰아쳤다. 이틀 뒤 영국계 신용평가사 피치가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로 하향조정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찻잔 속 태풍' 정도로 인식됐다. 세계 금융시장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럽 전체 GDP의 2.6%에 불과한 그리스 재정위기가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다고 본 것이다. 유로화 가치가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작년 11월 두바이 사태가 터지자 상황은 묘하게 전개됐다. 그리스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과도한 부채를 끌어들여 사막위에 '모래성'을 쌓은 두바이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전 세계 투자자들은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한 그리스와 남유럽 국가들로 시선을 돌렸다.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는 신조어가 금융시장을 떠돌기 시작했다. 재정위기에 빠질 수 있는 '국가 리스트'가 나돈 것이다. 피치는 작년 12월8일 그리스 신용등급을 다시 한번 하향조정해 'A-'에서 'BBB+'로 떨어뜨렸다. 곧이어 S&P와 무디스도 신용등급 강등에 동참했다.

올해들어 상황은 더 급박하게 돌아갔다. 지난 1월 하순 그리스가 신규 발행을 추진한 국채에 대해 중국이 인수를 거부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장이 요동쳤다. 지난달 초에는 그리스 재정적자 비율이 13.6%로 확정됐다. 그리스는 지난달 23일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고 며칠 뒤 그리스 국채는 '정크본드(투기등급)'로 전락했다.

◆미온적 대응이 위기 키워

초기에 '미풍' 정도로 인식됐던 그리스 사태를 복잡하게 키운 건 그리스 정부와 EU IMF 등 국제기구의 미온적 대응이었다. 그리스 정부는 재정위기가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적극적인 지출 축소가 아니라 세수 확대로 대응하겠다는 느슨한 해법을 내놓아 시장의 불신을 자초했다.

국제 공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럽 국가끼리 해결하자'는 프랑스와 'IMF도 지원에 참여시키자'는 독일이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EU는 사태 발생후 6개월간 이렇다할 해법을 못내놨다. 독일 정부가 지난 9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악재가 될 수 있는 그리스 지원을 차일피일 미룬 것도 한 요인이다. EU와 IMF는 이달초에야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을 확정했다.

여기다 그리스 강성 노조는 '줄파업'에 나섰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기득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장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그리스가 결국 채무 불이행(디폴트)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시장의 의구심이 커진 것이다. 구제금융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요동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리스가 디폴트 상황에 빠지면 주요 전주(錢主)인 유럽 은행들도 타격을 받게 된다. 실제 스페인 산탄데르 은행를 비롯해 프랑스 소시에떼 제너럴,독일 도이치뱅크 등의 신용부도스와프(CDS) 가산금리는 연초대비 100~170bp(1bp=0.01%포인트) 가량 뛰었다. 이들 은행의 부실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유로화는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 7일 유로화 가치는 유로당 1.2759달러로 작년 11월말 고점 대비 20% 넘게 빠졌다. 각국 증시도 하락세다. 지난주 프랑스 증시가 11.1% 하락한 것을 비롯해 영국(7.7%),독일(6.8%) 등 유럽 선진국 증시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 다우지수도 5.7% 밀렸고 아시아 증시도 충격을 받았다.

그리스 주가는 훨씬 이전부터 급락세다. 작년 10월말 2686에서 12월말 2196으로 20% 가까이 하락한 그리스 ASE종합지수는 올 들어서도 25%가량 추가 하락해 1630선으로 주저앉았다. 5년만기 그리스 국채의 CDS 프리미엄은 연초 280bp 가량에서 최근 940bp 가까이 치솟았다.

유승호/주용석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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