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뙤약볕이 내려쪼이는 아고라 광장이다. 70대 노인이 진종일 재판을 받고 있다. 배심원은 501명이다. 배심원 규모만으로는 벌금형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국외추방형을 받는 정도다. 그러나 노인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스스로를 '아테네의 등애'라고 불렀던 노인이다. 귀찮게 잔소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해가 낮게 깔리는 시간이 왔을 때 배심원단은 1차 투표에서 281 대 220의 근소한 차이로 유죄평결을 내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노인은 아부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배심원단을 준엄하게 비판했다. 형량을 결정하는 2차 투표는 놀랍게도 361 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무죄라고 평결했던 배심원들조차 대거 "죽여라,죽여라!"로 돌아섰다. 노인은 최후 진술에서 더욱 준열한 목소리로 배심원들을 꾸짖었다. "나의 처형 소식보다 더욱 빠르게 이 나라는 재앙을 맞고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잘 아는 이 노인은 소크라테스다. 역사는 이렇게 포퓰리즘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죄목은 대중 민주주의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인민재판으로 노 철학자는 생을 마감했다. 어리석은 자들의 민주주의는 너무도 쉽게 타락하고 기어이 부패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는 이처럼 오래된 것이다. 우리가 직접민주주의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아테네는 결국 중우정치로 막을 내렸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재기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채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그의 죽음보다 빨리 종말을 맞았다. 역사의 바통은 그렇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넘어갔다.

지난주 아테네 시가지를 점령하고 계급투쟁이라는 깃발조차 선명하게 흔들고 있는 격렬한 시위대를 보는 소감은 이렇게 고대 세계에서의 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이렇게 허약하고 언제나 이렇게 중우적이며 언제나 이렇게 포퓰리즘적 분배정치로 타락해 간다는 점을 새삼 고민하게 된다. 아니, 그리스뿐만 아니라 실은 유럽 전부가 이 함정에 빠져 있다. 68혁명으로 성립한 복지국가 체제는 유럽 대륙을 거렁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는 늙은 대륙으로 만들었다. 파판드레우 류(類)의 민중주의 정치가 그리스를 장악한 것은 1975년이다. 유럽 전부가 7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좌파 복지정부로 넘어간 끝자락이다.

대학을 평준화하고 노조의 권한을 강화하며 기업을 국유화하고 반미노선을 뚜렷이 한 좌파이념의 총화가 바로 68혁명이었다. 자본주의가 최번성기에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유럽 전부가 복지국가 · 큰 국가로 방향을 틀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낳는다는 논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마오(毛), 마르크스, 마르쿠제의 3M이 깃발을 선명하게 올렸고 그 30년 적폐가 지금 아테네 시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번 사태를 11년차를 맞은 유로화의 구조적 문제라고 분석하지만 그 본질은 대중 민주주의의 실패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재정 정책을 각국 정부의 손에 남겨놓은 것부터가 화폐의 타락을 음모해 둔 것이기도 했다. 대중주의에 함몰된 정부들이 무더기 빚을 내고 복지라는 사탕발림으로 국민들에게 정치적 뇌물을 먹이는 것에 미련을 가지는 이상 재정적자와 텅빈 국고는 피할 수 없다. 경제는 이렇게 정치의 볼모가 되었다.

국력 이상의 환율로 PIGS는 흥청망청 소비했고, 경제력 이하의 환율로 독일 등은 수출을 늘려왔다. 회원국들의 기만적 동상이몽까지 겹쳤다. 기실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그 어떤 위기대책도 술수에 불과하다. 7500억유로로 정신의 부패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지.국가로부터 더 이상의 뇌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배심원들과 다를 것이 없다. 공짜의 무언가를 약속하는 그 어떤 정치인도 사기꾼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논설위원겸 경제교육硏 소장 정규재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