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과학자,아티스트가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든다?"

과연 가능할까. 물론 과학도에서 SF 소설가로 전향한 작가도 있고,취미로 시를 쓰는 과학자도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분야의 달인들이 모여 하나의 소설을 창작한 경우는 드물다. 아니 제대로 해보기는 처음이지 싶다. '백탑파 시리즈'를 통해 우리 시대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난 소설가 김탁환,차세대 글로벌 리더인 뇌 과학자 정재승,여기에 그래픽 노블 작가 김한민까지 합세했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적이다.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실패하는 일 중 하나다. 과연 이 변신합체 로봇이 얼마나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결과물이 더욱 문제적이지 싶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무진장 재미있기 때문이다.

《눈먼 시계공》(글 김탁환 · 정재승,그림 김한민,민음사,전2권)은 2049년의 서울이라는 근미래를 시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2049년 특별시는 자연친화적 21세기형 도시인 동시에 유비쿼터스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메트로폴리탄이다. 상황에 따라 변신이 자유로운 슈퍼 스마트 수트를 입고 비행카페에서 뇌파 음악회를 즐기거나 로봇 채널로 로봇들의 격투 경기를 즐길 수 있다. 동시에 기러기 아빠가 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며,밤낮 없이 일해야 하고,격투기가 유행하고,사이버 마약과 섹스 중독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도시 정글의 법칙은 지금이나 2049년이나 유사하다.

작가의 지적대로 SF 소설가들은 '닥쳐선 안 될 미래'를 막기 위해 현실을 고민하고 미래를 그려낸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유토피아는 또 다른 미래의 희망으로 남고 디스토피아는 꼭 실현되고야 만다. 이미 2010년의 인류는 집단지성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고 로봇과 뇌를 활용해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나가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인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상상력은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미래의 인간은 그래서 더 행복할까.

2049년 특별시는 자유의지를 지닌 로봇과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가 공존하는 로보 사피엔스 시대이다. 100g도 채 안 되는 뇌는 인간의 마지막 정체성이자 영혼의 방으로,뇌에 대한 각계각층의 관심과 활용이 급증한다. '스티머스 수사팀'은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뇌에서 마지막 단기 기억을 영상으로 재생해 범인을 체포하는 특별팀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살인은 없는 탓일까,2049년에도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은 계속된다. 다만 그 방법이 좀 더 치밀하고 자극적이라 피해자들의 두개골을 열어 뇌를 꺼내고 꽃으로 채우기도 한다. 사건의 중심에는 스티머스 수사팀의 매력적인 검사 은석범이 있다. 그는 액션형 검사인 동시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사랑에 빠지고 시를 읊을 수 있을 만큼 낭만적 캐릭터다. 그나저나 연쇄살인범은 누구? 셜록 홈즈의 명언대로 범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백미는 미래에 대한 엿보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근본,인간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 있다. "분노라는 병은 모든 악을 압도한다" "기억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경험하는 경험의 질료이다"와 같은 아포리즘이 챕터(chapter) 시작마다 우리의 뇌가 아닌 가슴에 화두를 던진다. 이어서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매력적인 검사의 액션과 로맨스,세계 최강 격투 로봇들의 극적이고 생생한 한판 승부가 숨가쁘게 중계된다.

가상(virtual)은 일어나지 않았기에,그러나 일어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눈먼 시계공》은 SF 소설이면서 리얼리즘 소설이고,로맨스 소설이면서 추리 소설이다.

장르문학의 읽히는 재미와 관습성,본격문학의 주제의식을 절묘하게 얽어냈다. 이야기의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본래 뷔페나 종합선물세트는 포장보다 내용물의 질이 떨어지거나 가짓수에 비해 맛깔스러움이 덜한 법인데,발상부터 달랐기 때문일까. 《눈먼 시계공》은 좀 다르다.

소설로서의 재미와 지식의 전달에 능한 새로운 코스 요리를 맛본 기분이다. 솔직히 말해 질투가 날 지경이다. 크로스,트랜스,컨버전스,통섭 등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무엇이든간에 《눈먼 시계공》은 21세기 지식과 창조의 통합을 시도했고,성공했다.

한혜원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