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저녁 벨기에 브뤼셀,유럽연합(EU) 긴급 재무장관회의 현장.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회담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어 하마터면 파국으로 끝날 뻔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약물 과민반응으로 병원에 입원,회의에 불참하면서 대타로 급파된 토머스 드 메이지에르 독일 내무장관이 '사전합의를 뒤엎는' 강경자세를 보이며 협상장을 발칵 뒤집어놨기 때문이다.

당초 독일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총 6000억유로 규모의 EU 구제금융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구제금융기금 조성은 쌍무계약을 통한 대출 지급보증이나 직접대출(차관)의 두 가지 방식을 모두 허용하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돼 있던 사안이었다. 경제규모가 작아 당장 국가의 주머니에서 거액이 인출되는 차관 제공에 큰 부담을 느낀 대다수 유럽의 소국들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 기금의 상당 부분을 '지급보증'으로 커버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그러던 차에 드 메이지에르 독일 내무장관이 "EU 전 회원국이 빠짐없이 액수를 할당해 직접 대출을 시행토록 하자"는 강경책을 갑작스레 꺼내들었다. 유럽 경제의 40%가량을 차지하는 '큰형' 독일이 유로존 안정 작업에 실질적으로 가장 큰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의 '무임승차'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경직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에 유럽 대다수 소국들은 집단으로 '반기'를 들었다. 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가 "독일이 EU 내에서 독일을 제외한 전 회원국과 대립하고 있다"고 보도할 지경이 됐다.

같은 시각 영국 알리스테어 달링 재무장관은 "유로존 구제금융기금은 유로화 사용국에 한정된 문제로 영국과 상관이 없다"며 "파운드화를 쓰는 영국은 기금 설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딴죽을 걸었다. 지난 6일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하며 사실상 식물장관이 된 재무장관이 국제무대에서 마지막으로 행한 작업은 구제금융 지급 보증안에 영국이 불참키로 한 것이었다.

EU 핵심 지도국인 독일과 영국이 불협화음을 내는 바람에 공동의 위기대처 방안을 위기에 몰아넣는 형국이 됐다. 결국 EU 재무장관 회의는 원안대로 '대출을 지급보증하거나 직접 대출한다'는 애매모호한 내용의 합의만 도출됐다. 독일로선 자신만 손해볼 수 없다는 원뜻도 관철시키지 못하고 인심만 잃은 꼴이 됐고,영국은 EU 내에서 유로존과는 얽히지 않겠다며 반쪽자리 리더로 몰락했음을 자인해 버렸다.

그리스 위기 초기부터 EU 내 리더십 실종이 위기를 키웠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9일 실시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 선거에서 집권 중도우파 연정이 패배하면서 연방상원(분데스라트)에서 과반의석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스 사태에서 '방관자' 격인 영국도 1634억파운드(335조원)에 달하는 재정적자로 제 코가 석 자인 형국이다. 27개국으로 구성된 EU는 독일과 프랑스,영국의 3대 강국이 축을 이룬 형태로 운영돼 왔지만 이번 그리스 사태에선 10일 현재까지 누구도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 모습만 시장에 노출한 꼴이 됐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