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개발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행사(전체 공사 과정을 관장하는 회사)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통해 금융회사로부터 530억원을 빌렸다. 그런데 사업 도중 관할 관청에서 분양중지명령을 받고 사업부지 가압류를 당하는 등 문제가 일어나 시행사가 더 이상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사실상의 담보인 건물이 완공되지 못하자 금융회사는 시공사(시행사의 발주로 실제 공사를 담당하는 회사) 자격으로 공사에 참여한 건설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금융회사,시행사,시공사 3자가 체결한 개발사업약정에는 △시공사는 정한 기간 내에 책임준공해야 한다(책임준공 의무) △시행사가 사업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경우 시행권을 시공사에 양도한다(사업시행권 양수) 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행권이 시공사에 양도되면 채무를 변제할 의무도 시공사로 넘어가게 된다.

이에 시공사는 시행사와 별도로 맺은 공사도급계약 조항을 들어 반박논리를 펼쳤다. 공사도급계약에 따르면 시행사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 공사 수행이 어려운 경우에는 시공사가 책임준공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같은 대출을 두고 체결한 약정이 충돌할 때 무엇이 우선될까.

대법원은 금융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3부(주심 차한성)는 삼성생명보험(금융회사)이 한진중공업(시공사)을 상대로 낸 상고에서 책임준공 등을 시공사의 의무로 보지 않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시공사가 완공할 건물은 금융회사에는 중요한 담보"라며 "금융회사의 입장에서는 시행사(보스코산업)가 사업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신용도가 높은 시공사가 책임준공하도록 약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또 "시공사가 시행사와 책임준공의 예외사유를 정했다 해도,이는 시행사를 상대로 주장할 수 있을 뿐 금융회사에는 그럴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판결의 근거로 3자 간 체결한 약정에 '당사자들 중 일부끼리 추가로 약정했을 때 나머지 당사자에게는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본 약정과 개별계약이 상충될 경우에는 약정이 우선'이라는 조항이 있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하급심에서는 시행사의 귀책 사유로 사업을 더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금융회사의 청구가 기각됐다.

또한 1심에서는 3자 간 약정 중 사업시행권 양수 조항에 대해 시공사가 시행권을 인수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의무는 아니라는 시행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시행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시공사가 사업시행권 등 모든 권리와 의무를 인수하기로 약정한 것으로 판단했다.

법무법인 율촌의 신동찬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프로젝트 파이낸싱 약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시공사의 의무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며 "부동산 개발사업의 주체들은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에 대한 시공사의 책임준공의무 및 시행권 양수 조항을 명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