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은 이합집산의 계절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소신이 있느니 없느니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장수선무(長袖善舞)라는 말대로 소매가 긴 사람이 춤을 잘 춘다. 조건이 좋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출세하는 데 분명 유리하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운명이 바뀐 사례로 이사(李斯)만한 사람이 없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젊어서 군에서 낮은 벼슬아치 노릇을 했다. 어느 날 그는 쥐 두 마리를 보고 처세의 원리를 깨쳤다. 변소에 있는 쥐는 사람이나 개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도망을 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 있는 쥐는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여유있게' 지내며 사람이 나타나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사는 두 쥐를 보고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라며 출세를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다짐한다. 곧바로 진나라로 향한 그는 당시 승상인 여불위(呂不韋)를 찾아가 그의 사인(舍人),즉 집사가 됐다. 이후는 출세가도였다. 진시황의 생부이기도 했던 여불위가 추천해 진시황을 만난 그는 막강한 진나라에 눌려 바짝 엎드려 있는 다른 6개국이 힘을 합쳐 합종하기 전에 그들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그를 궁궐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관리의 우두머리인 장사(長史)로 삼는다.

절대 권력자의 신임을 얻은 이사는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뇌물도 주고, 협박도 하며, 이간책도 쓰는 등 갖은 계략을 동원하여 결국 객경(客卿)이 된다. 그 사이에 자신을 찾아온 한비자(韓非子)도 제거하는 무자비함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한비자는 그와 함께 순자(荀子)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한 동문이었다.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이사는 기존 세력들이 자신을 내쫓으려 진시황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진시황에게 올렸다. 진 목공이 다섯명의 인재를 타국에서 데려와 서융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란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덕분이라며 비유적으로 진시황을 추켜세우고 개방인재론을 설파했다. 이 한마디로 그는 오히려 권력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가혹한 조치로 사상과 문화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면서 진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그런가. 제비나 참새가 지붕이나 처마 밑을 떠나게 되면 매나 송골매에게 잡혀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나보다 강한 자는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다. 이사 못지 않은 권력욕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환관 조고(趙高)였다. 50세에 객사한 진시황을 이어 영원히 재상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사의 야심을 알았던 조고는 회유와 협박이라는 전략적 카드를 쓰며 이사를 흔들었다. 결국 이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서위조 사건에 연루되면서 허리가 베이는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이사보다 강한 자는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몽염(蒙恬)장군이 아니었다. 만리장성을 짓는 공을 세워 진시황의 총애를 받은 몽염이 이사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엉뚱하게도 평소 "궁궐에서 잡일이나 한다"던 환관 조고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사는 죽음 앞에서 세상의 이치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탄식했지만 결국 그 비극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던 셈이다.

좋은 자리,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는 자는 드물다. 권세를 가지고 있다 보면 아무래도 거기에 탐닉되어 오만방자해지게 돼 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겸손의 미덕을 쌓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살아가는 자기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당선되는 그 날로 이런 다짐부터들 하시길.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김원중 교수는 충남대 중문과와 대학원을 거쳐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중국 고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문화사>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