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모든 일이 우연과 예기치 않은 기회로 시작됐다. 1978년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을 앞두고 학과 사무실에서 대한전선의 연구원 인력채용 모집공고를 본 것이 인생을 결정지어 버렸다.

입사 면접 때 질문을 받은 'OF케이블'도 마찬가지.전력케이블의 한 종류인 'Oil Filled 케이블'로 생각해 얼른 대답했지만,면접관은 '기존의 동통신 도체가 아니라 새로 개발된 꿈의 통신소재인 'Optical Fiber(광섬유)'를 말하는 것"이라고 바로잡아 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평생 이 용어를 끼고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입사 이듬해인 1979년부터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위탁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게 됐다. KIST와 대한전선이 광섬유를 합동연구프로젝트로 정해 개발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KIST와 대한전선은 1982년 한국광통신주식회사라는 합작사를 설립했고 나는 생산기술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광섬유 제조 특명을 받았고,이를 위해 필요한 설비 구성과 설비 도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광섬유는 반도체와 초반부 공정이 비슷해 반도체 설비를 들여오기로 했다. 일단 미국에 있는 타일란(Tylan)사로부터 반도체 제조설비를,선반은 세크라멘토에 있는 리튼(Litton)사로부터 수입하기로 했다. 수입해서 설치할 기술조차 없었기에 우선 타일란사에 가서 2주간의 연수를 받고 그 다음은 리튼사로부터 선반 관련 기술을 단기간에 다 익혀와야 했다.

그렇게 홀로 떠난 출장길은 엄청난 중압감을 안겨다줬다. 게다가 나는 영어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던 터였다. 타일란 측의 강의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기를 쓰고 며칠을 들었더니 어느 날 저녁에 호텔로 돌아오자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릴 힘도 없을 정도로 파김치가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 땅.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나 아니면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장 전에 갓 태어난 아기 사진을 가슴에 품고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세크라멘토에서도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공항에 내렸지만 리튼사를 찾아갈 길이 막막했다. 공항 청소부 할아버지를 붙잡고 손짓 발짓으로 겨우 물어물어 그라스벨리의 리튼사로 찾아갈 수 있었다.

고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설비를 들여왔으니 세팅하고 설치하는 것에서부터 제품을 생산해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다같이 힘을 모았지만 미국에서 직접 배워온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더욱이 당시 한국광통신주식회사는 한 달 뒤 대한전선과 금성전선에 광섬유 납품을 맞춰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임무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도 시제품이 계속 불량으로 판정받았다. 회사 앞 경비실에서 무려 20여일을 먹고 자고 하면서 매달렸지만 불량품이 나왔다. 이유도 몰랐다. 같이 일하던 부장과 '납기 못 맞추면 우리 둘 다 책임져야 한다'면서 사표를 서랍에 넣어두고 다녔을 정도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검사담당 직원의 어깨너머로 광섬유 단면을 처음 검사할 때 왼쪽에서 불량이 나왔는데,광섬유를 90도 정도 돌렸는데도 왼쪽에서 불량이 체크되는 것을 목격했다. 거기에 답이 있었다. 광섬유가 불량이 아니라 검사장비가 불량이었다. 검사장비를 교체했고 무사히 납기를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처음 광케이블이 깔린 곳이 인천에서 간석 구간의 전화망이다.

지금도 연구실 한 구석을 침실로 삼아 연구에 몰두하는 후배들이 많다. 조금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어도 묵묵히 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열리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