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을 세운 산악인 오은선은 "고소(高所) 적응에 걸리는 시간보다 하산해서 평지에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고,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빨치산 출신 작가 이태가 쓴 '남부군'에도 뜻밖의 얘기가 나온다. 지리산에서 쫓겨 다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에 잡혀 평지로 내려온 이후 공통적으로 앓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땅멀미'란다. 오랜 기간 경사가 심한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면서 지낸 사람에게는 평지가 오히려 어색하고,발을 헛디디다 못해 멀미까지 앓게 되더라는 것이다.

베테랑 산악인들조차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서 원래의 익숙한 환경인 평지로 돌아오는데 고통스런 적응과정을 거쳐야 하고,구릉지대에서 오래 생활했던 사람은 배멀미 · 차멀미와 증세가 똑같은 땅멀미를 앓아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비정상(非正常)이건 아니건,인간은 그렇게 자신을 익숙하게 만든 환경의 포로가 되고 만다.

남유럽 재정위기와 태국 반(反)정부 시위 사태의 공통점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중독에서 비롯된 '집단 땅멀미'가 근원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재정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복지와 공공지출로 국민들의 의타심(依他心)만 잔뜩 키워 놓은 게 그리스 재정위기의 본질이다. 사회당을 창건한 파판드레우가(家)가 3대(代)에 걸쳐 여섯 차례나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로 GDP의 18%를 사회보장에 쏟아부은 포퓰리즘을 꼽는 건 무리가 아니다.

그리스 정부는 IMF와 독일 등 외부의 긴급 자금지원 전제조건을 받아들여 GDP의 13.6%로까지 불어난 재정적자를 3%로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불가능한 임무(mission impossible)'라고 일갈했다. 엄청난 재정적자 규모 자체도 문제지만,포퓰리즘의 단맛에 중독당한 사람들이 금단(禁斷)의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태국도 다를 게 없다. 반정부 시위대의 정신적 지주는 4년 전 축출당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씨앗을 뿌리고 싹 틔운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환상이다. 그는 재임기간 중 농민과 서민들에게 무료에 가까운 의료혜택과 장기저리 융자를 제공해 높은 인기를 누렸다. 예전의 웬만한 정치 갈등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로 숭앙받고 있는 푸미폰 국왕이 추상같은 중재(仲裁)로 해결했지만,그조차 궁궐 속에 숨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만큼 '탁신 포퓰리즘'의 후유증은 크고 심각하다.

남의 나라 얘기만 할 때가 아니다. 한국도 '약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실시하고 있는 인기영합적인 정책의 그림자가 만만치 않다. 지난 10년 새 취약계층 소득을 보전해준다며 도입된 각종 비과세 · 세금감면금액만 3.7배 불어나 지난해 28조여원에 달했다. 이 금액만 거둬들여도 재정균형이 달성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초 · 중등학교 무상급식 확대,유치원비 무상 지원 등 선심성 정치 아젠다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시장주의 정당을 자임해 온 여당조차 기업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에 대해 '예외'를 연발하며 눈앞의 표 끌어 모으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포퓰리즘의 최대 죄악은 사람들을 공짜병(病)에 감염시켜 자생력과 자기 회복능력을 망쳐놓는 데 있다. 그리스와 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퓰리즘 땅멀미'의 진통을 지켜보면서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지 못한다면 희망은 없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